지난 기획/특집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제9차 유럽 수도원 순례] (1) 체코와 헝가리 미지의 수도원 - ‘사자바’와 ‘파논할머’

노춘석(창녕공고 교사)
입력일 2014-02-18 수정일 2014-02-18 발행일 2014-02-23 제 288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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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털고 옛 수도원에서 마주한 하느님 세상
체코 사자바 수도원 한국 그룹으로선 첫 방문 ‘영광’
역사관으로 잔존 … 세 시간 돌림기도 전통은 그대로

헝가리 파논할머서는 천년된 ‘수도원 허가서’ 발견
라틴어 필사본 등 40만권 장서 지닌 도서관 보유
유럽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을 찾아 가톨릭교회 정통 영성을 확인하는 가톨릭신문 제9차 수도원 순례가 지난 1월 6~18일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4개국에서 진행됐다.

총 30명이 참가한 가운데 김정우 신부(대구대교구 대신학원장) 지도로 이뤄진 순례는 수도원 발전의 역사를 역순으로 순례하는 일정이었다. 특별히 베네딕도수도회 중에서도 수도원 쇄신에 앞장섰던 시토회를 중심으로 순례가 펼쳐졌다. 순례에 참가한 노춘석(멜라니아)씨의 체험기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 수도승의 영성과 오랜 신앙의 터전이 된 곳을 찾아 믿음과 사랑을 깊게 하는 제9차 유럽 수도원 순례는 체코 프라하의 아기예수성당 미사로 출발한다.

아기예수님은 3천벌이 넘는 옷을 두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작은 모습으로 순례단에게 모든 것을 탈탈 털어내고 순례를 하라신다. 공산치하의 혹독한 박해 이후 하느님이 멀어진 체코에 그 옛날 스페인의 수사가 새긴 아기예수는 슬프고 몽롱한 눈빛으로 신앙의 봄을 바라신다.

잘 알려지지 않은 체코 사자바 수도원과 헝가리 파논할머 수도원, 알프스 깊은 골짜기 오지에 있는 오스트리아 포라우와 라인 수도원, 마리아젤과 이태리 마돈나 델라 코로나 등 여러 곳을 순례할 기대와 설렘은 이미 일상을 버리고 하느님 세상으로 이끌어준다.

프라하에 살았던 카프카문학의 부조리가 오늘은 신앙의 절망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황금소로의 프라하, 카펠교 위, 네포목 사제의 발이 닳도록 소원을 비는 사람들과 광장의 화려한 트리 불빛과 흥청거리는 밤거리의 프라하는 다만 낭만의 옛 도시였다.

“나를 불쌍히 여기세요. 그러면 나도 여러분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경배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라는 아기의 속삭임은 애절하게 불타바 강물처럼 흐르고 동방전례와 슬라브 신앙의 터전이었던 사자바로 순례단은 떠난다.

체코 프라하 아기예수성당의 전면.

■ 폐허에 울리는 사자바 기도

수도원 창설 이래 한국팀의 첫 방문이라며 관리인은 겨울에 문 닫은 수도원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사자바는 1032년에 울드리히 왕자가 세운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사자바마을 위쪽에 있다. 쭉쭉 뻗은 나무숲을 지나 마을이 나오고 미완성인 수도원의 황량한 붉은 종탑의 빈 창문에는 마른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기둥 사이 파란 잔디밭은 공허한 폐허의 느낌을 준다. 낡은 담은 부스러지고 종탑 앞에서 말을 잃은 순례자들은 정원에서 역사를 듣는다.

1097년 동방전례 발전과 키릴문자를 만들어 슬라브 성서 번역과 복음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수도원에 로마교황청은 동방전례를 금지시키고 초대원장 프로코피우스는 화형된다. 15세기 후스의 종교개혁으로 성당 건축은 중단되고 1785년 요세프 2세의 수도원 해산으로 문을 닫아 현재는 슬라브 민족의 유품과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역사전시관이 되었다. 피폐해진 수도원은 역사의 무상함이 곳곳에 남았지만 촛불이 켜진 작은 경당에는 프레스코화의 은근한 성화들과 1천의 악마를 이긴 창설자 프로코피우스 성인의 유해와 성모님의 생애를 그린 아름다운 벽화 앞에서 지금도 사자바 사람들은 옛 수도원의 전통을 지켜 세 시간마다 돌아가며 기도를 하며 언젠가는 수사들의 힘찬 찬미노래로 적막강산 사자바가 찬란한 하느님의 영광이 될 날을 기원한다.

겨울나무 사이로 남빛 구름이 걸린 아름다운 사자바에서 빼곡한 잎을 버리고 다른 풍경을 담는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이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라며 오신다.

체코 사자바 수도원의 종탑.

■ 헝가리인의 영혼의 고향, 파논할머 수도원

공산치하 동구권에서 신앙의 터전을 유일하게 지켜낸 대단한 헝가리 파논할머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 마르티노의 유골을 모신 지하 성십자가 성당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 작은 경당은 13세기 벽과 장식 그대로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이곳의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3세기 초 고딕으로 재건되나 오스만터키군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어 17세기 바로크양식으로 화려하게 복구된다.

헝가리, 멀고 먼 낯선 수도원을 찾은 순례단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공산당의 박해와 투옥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순교정신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라틴어 필사본 등 40만권 장서가 있는 베네딕도회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가진 파논할머, 층층이 쌓인 고서들 위로 높은 천장 유리창에 스미는 빛과 화가와 건축가의 신심어린 손길이 넓게 담긴 아름다운 19세기 도서관은 옛 시대를 말하고 있다.

검은 두건의 수도승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창가에서 조심스레 책장을 넘길 무렵, 창밖에 함박눈이 휘날리면 완전한 고요가 내려앉고 무아지경에 빠진 오래 전의 수도승, 그가 몰입한 오로지 하나의 세상……. 지적 영적 정서적인 욕심을 마음껏 누려도 좋을 수도승의 충만한 시간의 흔적인 책 냄새는 넓은 홀에 가득하다.

1001년 라틴어로 된 수도원 허가서와 “사랑에 빚을 지지 마십시오.” 라는 최초의 헝가리어로 쓰인 「사랑헌장」은 귀중한 보물이다.

핍박과 압제의 공산치하에서 수도원은 자유주의 항쟁을 강하게 펼쳐 모든 것을 지켜내었다. 해방 후, 북한 덕원 수도원의 책과 귀중한 문서들은 포장지가 되고 파이프 오르간은 고물상에 넘겼다는 말이 아프게 닿는 곳, 어느 탈북 형제는 오랜 세월 하느님이 자신들을 버린 줄 알았다고.

이곳은 토속신앙의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이끌어 990년 부족장 기저의 도움으로 첫 수도원이 설립된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거룩하게 꾸며진 성당과 베네딕도 성인의 일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는 수도원을 돌며 역사와 문화와 신앙을 만나는 시간, 성인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다. 우리 순례의 끝자락은 수비아코와 몬테카시노, 거기서 우리는 수도원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을 제대로 만날 것이다.

경당의 신형 오르간은 줄리아드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자매의 연주로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순례의 기쁜 미사가 된다.

수도원 베란다에 서면 언덕 아래 쫙 펼쳐지는 파논할머와 저 멀리 들판과 산들이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는데 안개 자욱하여 붉은 지붕의 마을만 어스름하다. 중세의 추억은 안개에 묻혀 아스라이 멀다. 저 아래에서 수도원을 올려다보며 하늘세계를 기원하며 기도의 삶을 산 무수한 사람들, 그 열망은 거대한 파논할머 수도원과 헝가리의 정신과 긍지가 된다.

파논할머를 건축하며 먼저 동쪽 제단을 만들어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한 수사들의 마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사랑에 빚을 지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 파논할머의 30여 명 수사들은 헝가리 교회의 중심이요, 신앙의 지주요 영혼의 고향에서 신앙 수호를 위해 고통의 역사를 지나 당당하게 부활한 승리를 증거하고, 수도원 김나지움 학생들은 중세 유럽 문화의 동부지역 교두보 역할을 한 수도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 동유럽에 하느님의 사랑을 꽃피우는 등불로 자라기를 키 큰 미루나무들은 꿈꾸고 있다.

사자바의 씁쓸함이 환희가 되는 파논할머 수도원 순례는 마음 깊은 사랑이 되고 좋은 것을 나누기 위한 순례라는 지도신부님의 말씀처럼 참 은총의 시간을 누리며 안개길을 따라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한다. 알프스 깊은 산속 수도원으로!

헝가리 파논할머 수도원 도서관. 라틴어 필사본 등 4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파논할머 수도원 성당 내부.

노춘석(창녕공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