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36·끝) 아시아신학의 흐름과 전망 ④ 아시아의 땅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입력일 2013-12-17 수정일 2013-12-17 발행일 2013-12-25 제 2875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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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땅에 실재하는 복음의 힘 식별을 아시아 신학은 하느님 자애로움 전하며 오실 길 곧게 닦고 준비하는 희망찬 시도

세계화로 더 가까워진 아시아의 이웃들
이들에 대한 연대적 사랑·자비의 마음 필요
오늘은 대림 제4주일이다. 불이 모두 켜진 제대 앞의 대림초 네 개가 말해주듯이, 지금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가슴 벅찬 희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우리에게는 그 어떤 외적 준비나 화려한 행사보다도,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내적이고 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대림과 성탄이 단지 연례적 축제나 행사로만 끝나버린다면, 진정 중요한 신앙의 핵심을 놓치고 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묵상해야 할 성탄의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

산과 언덕을 낮게 하여 골짜기를 메우며

대림시기의 미사 독서와 복음 중, 특히 다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이사 40,3-5)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사람과 그 아내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두 아들을 낳는다. 형 카인은 농부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가 되어, 둘 다 주님께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만 기꺼이 굽어보셨고, 이에 화가 난 카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살해하였다(4,1-16 참조). 이 성경 이야기는 어리석은 교만과 탐욕에 빠져 하느님의 뜻과 명령을 거역한 인간이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상태로부터 쫓겨난 후,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죄악성을 드러낸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하여 카인과 아벨의 경우처럼, 분열과 상처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 즉, 하느님에 대한 죄와 인간에 대한 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여기에서 암시된다.

이러한 죄와 벌의 연결성은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창세 11, 1-9 참조).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목적과 동기는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4절)는 것이었다. 당대의 우주론적 세계관에서 하늘이란 하느님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렇듯 자신의 본분을 잊고서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침범하려고 도전하는 인간의 무분별한 오만함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통교가 깨어지는 벌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매우 왜곡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인간 역사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죄악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에 언급한 루카 복음서 3장은 이사야 예언서 40장을 인용하여, 산과 언덕을 깎아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데는 곧게 하며,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함으로써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마음 안에 쌓여진 교만의 산과 탐욕의 언덕을 낮게 하여, 그 깎아내린 흙으로써 깊이 패여 있는 분열의 골짜기와 상처의 계곡을 메우려 노력할 때, 비로소 주님의 오심을 맞이할 준비가 이루어짐을 시사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임하시면, 비틀어진 우리의 마음이 태초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즉, 뻣뻣하게 굳고 차갑게 얼어붙어 거칠어진 우리의 마음이 본래의 온전하고 부드러운 상태, 즉 ‘충만한 평화’(샬롬)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이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지구촌의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애덕

우리는 대림과 성탄 시기를 보내며, 한편으로는 우리 마음속 집착의 산과 욕심의 언덕에서 모두 벗어나 겸허히 회심하도록 애써야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가난과 소외의 골짜기에서 고통받는 이웃들 곁으로 다가가 도움과 돌봄의 애덕을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의 진행으로 이 표현의 외연이 매우 넓어졌다. 즉, 정보통신의 발달로 이제 전 세계의 공간적 거리가 매우 좁혀진 까닭에, 지구촌의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모두가 다 내가 관심을 두고 돌보아야 할 가까운 이웃이 된 셈이다. 이는 ‘세계화’(globalization)가 가져온 여러 결과들 중, 하나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 이 주제에 대한 언급이 이미 발견된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수단이 더욱 편리해지고 인간들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극복되어 전 세계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된 현대에, 자선 사업과 활동은 매우 절실해지고 더욱 광범위해졌다. 오늘날의 자선 활동은 모든 사람과 온갖 빈곤에 다 미칠 수 있고 또 미쳐야 한다. 음식, 음료, 의복, 주택, 의료, 직업, 교육 등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없고, 재난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추방을 당하고 옥고를 겪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그들을 찾아내어 열성적으로 보살피고 위로하며 도와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8항)

그리고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 역시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2005)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 “오늘날 대중 매체는 우리 지구를 더욱 축소시키고 여러 민족과 문화들 사이의 거리를 급속하게 좁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함께함’은 때때로 오해와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요구를 거의 즉각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과 어려움도 함께 나누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진보에도, 물질적, 정신적인 온갖 빈곤 때문에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고통이 있음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을 돕자는 새로운 각오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은 국가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점차 전 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30항)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관심을 두고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복음적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가? 때로는 각 개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악한 결과들이 한데 모여 바벨탑과도 같은 거대한 구조적 악이 되어서, 사람들을 다시 죄짓게끔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주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힘이 이 비구원의 슬픈 현실 위에 온전히 실현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아시아신학의 전망에서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의 땅에서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현존과 성령의 역동적 활동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시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을 향한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셨고, 병들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성령의 힘으로 모두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주변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마태 25,34-40 참조).

아시아의 땅에서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가엾이 보고 공감하시는 자비와 연민과 사랑 가득한 마음을 드러내신다.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과 죄인들을 향해 그 온유한 마음이 더욱 빛을 발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아시아신학을 한다는 것은, 아직 복음의 손길이 두루 미치지 못한 아시아의 땅에서 주님의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을 널리 전하며 그 오시는 길을 닦고 준비하는 희망찬 시도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멋진 크리스마스카드나 선물, 혹은 흥겨운 캐럴,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 이들은 다 부차적인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가난과 어둠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우리의 연대적 사랑과 자비의 마음 안에서 작은 빛으로 태어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끌어안고 느끼며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 곧 “임마누엘”(마태 1,23)이시기 때문이다.

아시아 대륙에 만연한 가난과 고통의 실재 속에 복음의 역동적 힘이 관통하여 참된 구원의 미래가 이루어지기를 지향하며, 오늘도 우리는 미약하나마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고자 한다. 우리의 마음속 교만의 산을 낮게 하고 탐욕의 언덕을 편평하게 하여, 분열된 사람들 사이를 다시 잇고 깨어진 통교를 회복하며, 깊은 상처의 골짜기를 용서와 화해로써 치유하여 다시 메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이처럼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마련하려는 우리의 작은 헌신과 간절한 기도 속에 언젠가 구원의 은총이 아름다운 선물처럼 주어질 것임을 믿고 희망한다.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 이번호로 ‘현대가톨릭신학의 흐름’ 기획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행렬중인 베트남 사제들. 베트남 가톨릭 신자수는 600만 명 정도이며 남아시아에서 필리핀에 이어 두 번째로 신자수가 많다. 【CNS】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