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공동기획 - 신앙의 해, 신앙의 재발견] (39·끝) 가난한 사람들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3-12-10 수정일 2013-12-10 발행일 2013-12-15 제 2874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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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과 은총은 무관 … ‘자발적 가난’으로 복음살이를…
급속한 경제성장 결과로 신자들도 점차 중산층화
형편 어려우면 교회 활동조차 힘들어지는 현 상황
그리스도 강조하신 ‘나눔의 가치’ 구현하는 삶 필요
그릇된 행복관

“신자가 되고 난 후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힘든 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참행복’으로 선언한 가난은 난해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물질만능주의’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오히려 가난은 불행과 등치되는 말로 읽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예수의 ‘행복 선언’은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교회 안팎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복음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찾는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이강서 신부(서울 삼양동선교본당 주임)는 “행복은 과정과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것임에도, 물질적 가치 안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가난을 불행으로 인식하게 된다”면서 “행복을 물질적 토대와 완전히 치환해서 바라보게 되면 복음마저도 불편한 처지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 없으면 사람 구실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교회에마저 침투해 그리스도 정신을 야금야금 잠식해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 신부는 “가난한 이는 우리 사회가 구가하고 있는 풍요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낙오자라는 왜곡된 의식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 때문에 복음적 가난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조차 가난을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가난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세상이 심어준 것일 뿐 복음 정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가난과 멀어지는 교회

- 본당 일도 대부분 ‘있는 사람들’ 차지, 가난한 이는 ‘주변인’ 신세

가톨릭신문이 지난 2007년 창간 80주년을 맞아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 천주교 신자 월평균 소득은 360만 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국민 305만여 원(통계청 자료)보다 17.8%나 높은 수치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의 월 소득은 400만 원 이상이 27.1%로, 200~300만 원 23.6%, 300~400만 원 22.4%, 100~200만 원 16.7% 보다 높게 나타났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의 직업 분포를 보면, ‘생산·단순노무직, 기능직 종사자’(11.4%)는 2006년 통계청의 같은 업종 일반국민 직업 비율(32.7%) 보다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반면 신자들의 ‘사무 관련직’ 비율은 29.2%로 일반국민의 14.1%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중산층 붕괴를 염려하는 사회 현실과는 달리 교회 내 중산층은 오히려 늘고 있는 것이다.

김정식(가명·베네딕토·47)씨는 얼마 전 운영하던 회사가 경제난으로 부도나면서 본당에서 맡고 있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야 했다. 교무금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아 성당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돈이 없으면 자신이 원해도 본당에서 봉사하기 힘들어지고, 사제나 수도자와의 관계도 소원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박희정(가명·베로니카·48)씨도 2~3년 전까지만 해도 남부럽지 않게 살던 중산층 주부였다. 적지 않은 돈을 내놓아 복지시설을 후원할 정도로 신앙생활에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 사업이 기울면서 월세방을 전전하는 밑바닥 생활이 시작됐다. 동시에 신앙생활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교무금을 내지 못하자 주위 ‘중산층’ 신자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제, 수도자들과도 멀어졌다.

중산층에서 탈락한 이들이 교회에서 밀려나고 있는 가운데 애초 중산층에 들지 못했던 가난한 이들의 교회 내 활동은 더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돈이 진입장벽이 돼버린 셈이다.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장 맹제영 신부는 “중산층 붕괴와 맞물려 교회를 둘러싼 현실은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을 야기해 복음적 판단을 어렵게 하는 면이 적지 않다”면서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결여되고 결핍되어 있고, 부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약속 받은 복음의 담당자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질 때 가난으로 인한 소외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와 가난

- 가난은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등을 통해 가난에서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 예수는 지상 재화에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루카 14,33 12,33-34). 이러한 복음에 따라 교회도 가난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사회의 변화를 요청한 교황 레오 13세의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5.15.)이 본격적인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12.30.)에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공식화시키면서 ‘이 세상의 재화는 원래부터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다(42항).

이렇듯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면서 가난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교회 창립자이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이강서 신부는 “바리사이들은 재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지만 예수님은 재물과 은총이 무관하다고 보셨다”며 “풍요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한 결과라면 불의”라고 말했다. 이 신부는 또 “가난한 이들의 자리가 사라진 중산층화된 본당 신자들만을 위한 사목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나눔이 사라지게 된다”면서 “더 이상 풍요로워지길 멈출 때, 자발적으로 가난을 받아들이고 충분하다고 느낄 때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와 멀어진 삶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교구 내 가난한 이웃을 직접 만나 위로를 전하고 있는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모습.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