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웅모 신부의 아름다운 성화 아름다운 인생 (68·끝) 프랑스 루오 재단 ‘십자가의 그리스도’

정웅모 신부 (서울 장안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3-12-10 수정일 2013-12-10 발행일 2013-12-15 제 2874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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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
예수님 죽음 부활한 십자가에서 동시 표현
수난 통한 예수님 인간사랑 극명히 드러내

조르즈 루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
20세기 최고의 종교화가인 조르즈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는 한 평생 성화를 그렸다. 그는 수많은 성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삭막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강하게 말했다. 동판화 ‘십자가의 그리스도’(1936년)는 루오가 남긴 빼어난 성화 가운데 한 점이다.

이 작품에서 비록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지만 그분의 몸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한 십자가 안에서 동시에 표현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돌아가셨지만 부활해 여전히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우리와 함께 머물고 계심을 알려준다.

오른쪽에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랐던 두 사람이 그분의 가르침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중이다. 그리고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서 예수님의 죽음 안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십자가 뒤의 하늘은 부활을 상징하는 새벽빛으로 물들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했던 예수님의 삶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조르즈 루오(Rouault Rouault, 1871~1958), ‘십자가의 그리스도’, 1936년, 동판화, 64.8×48.7cm, 루오 재단, 파리, 프랑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비슷한 구도의 작품은 루오가 1922~1927년에 발행한 ‘미세레레’ 판화 연작에서 찾을 수 있다. 총58점으로 제작된 ‘미세레레’는 작가가 제1차 세계대전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가운데 탄생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31번째 판화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같은 구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의 제목은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 중에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면서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예수께서는 공생활 중에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이제 그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사랑을 보여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모든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무죄한 이를 못 박은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보다 더 큰 그분의 사랑이 동시에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 멀리 있는 사람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을 당부하셨다.

지금 사목 중인 장안동성당의 제단 벽의 중앙에는 커다란 목재 십자고상이 걸려있다. 그 아래에 있는 제단에서 매일 미사를 집전하지만 바로 내 뒤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제단 위의 사제석에 있다 보면 십자가가 잘 보이지 않아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신자들보다도 더욱 많다.

주일이나 평일미사가 끝나면 신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떠나도 떠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는 분은 오로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뿐이시다. 텅 빈 성당의 텅 빈 신자석에 앉아 있으면 비로소 커다란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고 그곳에 매달린 채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면서 당신처럼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모든 이를 안아주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의 말씀을 하시기 위해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들 곁을 다시 찾아오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늘 우리들 곁에 있듯이 주님의 큰 사랑 또한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으로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지난 2011년 4월 24일부터 오늘까지 68회에 걸쳐서 성화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랫동안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가톨릭신문사 관계자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 정웅모 신부의 ‘아름다운 성화 아름다운 인생’ 연재를 마칩니다. 2년 8개월 동안 수고해주신 정웅모 신부님과 성원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정웅모 신부 (서울 장안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