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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나는 세상 시장사람 이야기 (7) 서울 ‘동대문 시장’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3-12-03 수정일 2013-12-03 발행일 2013-12-08 제 287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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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물건 싸게 팔고 사는 재미
훈훈한 인정은 덤이라오
재래도매시장·현대 쇼핑몰 공존하는 ‘패션’의 중심
3만5천여 개 상점 15만 명 상인 활동 … 세계적 규모
손님들의 발걸음이 잦아든 새벽 서너 시 무렵. 상인들이 종이컵에 뜨거운 커피 한잔씩을 채워들고 모여 앉았다. 이젠 좀 편하게 질문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할 찰나, 도매상점 경력 32년 ‘베테랑’ 상인이 대뜸 스피드 퀴즈를 낸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곳은? - 재래시장!

우리나라 대표 의류도매시장은? -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최신 유행 옷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 곳은? - 동대문시장!

낮보다 밤이 화려한 곳은? - 동대문시장!

생뚱맞은 질문과 답에 한바탕 웃던 상인들은 각 지방에 보낼 물건들을 마지막으로 포장하기 위해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윽고 겨울 해가 늑장을 부리며 얼굴을 비칠 준비를 할 즈음 밤샘 장사에 지친 동대문 야간도매시장 상인들의 귀갓길이 시작된다.

동대문 상권은 3만5000여 개 상점에 15만여 명의 상인들이 활동하는 세계적 규모의 패션산업 집적지이다. 하루 동안 이 지역을 오가는 유동인구만 평균 100만 명을 넘어선다. 동대문종합시장 뿐 아니라 수십 개 상가형시장과 쇼핑몰로 형성된 곳이지만, 대중들은 이곳을 여전히 ‘동대문 시장’이라고 부른다. 이번 호 ‘살맛나는 세상 시장사람들 이야기’에서 찾아간 곳은 재래식 도매시장과 현대식 쇼핑몰이 공존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선보이는 ‘동대문 시장’이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흥인지문(동대문) 동쪽으로는 하루 24시간 도소매 쇼핑이 가능한 상가와 쇼핑몰들이 즐비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도소매 상인들과 해외바이어들, 외국인 관광객들을 비롯해, 단돈 천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발품을 파는 가정주부, 10대 청소년 등도 너나할 것 없이 한번쯤 들렀다 가는 곳이다. 제대로 둘러보려면 밤에 가야하는 도매상가들의 집합지이기도 하다.

동대문 지역에서 전통적인 도매 상권을 이루는 중심은 각종 원단과 의류부자재, 액세서리 등을 한꺼번에 살 수 있는 동대문종합시장이다. 이 시장은 1970년 12월 단일시장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로 문을 열었다. 원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흥인지문을 기준으로 서부 도매시장은 평화시장과 통일상가 등을, 동북부 도매시장은 동평화시장과 신평화시장 등을, 동남부 도매시장은 제일평화시장과 유어스 등을 중심으로 뻗어나가 있다.

해가 지고 네온사인들이 화려한 빛을 뿜기 시작하면 도매시장들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이 시간엔 어느 상가 안팎에서든 잠시라도 멈칫하면 떠밀리기 일쑤다. 평균 3~4평, 작게는 1~2평 공간에 자리 잡은 수만 개의 매장들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옷가게 ‘사장님’들이 발 빠르게 몰려든다. 일반 소비자들은 2명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복도에 손님들과 지게꾼들, 성인키만 한 배달물건들까지 들어차면 지나갈 엄두를 내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이 좁은 골목에 몇 차례 오가다 보면 한겨울 찬바람에도 송골송골 땀을 흘려가며 뛰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 없다. 온 세상이 잠든 때가 ‘동대문 시장’ 상인들에게는 삶의 열정을 채워가는 희망의 시간이 된다.

네온사인 불빛에서 돌아서면 오랜 불황에 찌든 주름도 감출 수는 없다. 특히 이곳 도매상점들은 해외 중저가 브랜드의 대량 물량공세에, 우후죽순 들어선 최신 쇼핑몰들과 인터넷 쇼핑몰 등의 경쟁력에 밀려 하루하루 힘겹게 운영하기 일쑤다.

그래도 상인들이나 소비자들이나 질 좋은 물건을 싸게 팔고 사는 살림 재미에 ‘동대문 시장’을 떠나지 않는다.

지난 1988년부터 동대문에서 도매 상가를 운영해온 이덕수(아가타·55)씨는 “자기 덩치보다 큰 물건을 이고지고 뛰는 이들을 보면 덩달아 삶의 열정이 차오르곤 한다”고 말한다. 남성복을 판매하는 김행심(클라라·57)씨는 아무리 바빠도 건네는 영수증마다 따스한 인사말 한 줄을 빼놓지 않고 쓴다. 바쁘게 물건을 싸들고 가는 이들도 뒤늦게 영수증에 적힌 인사말을 보고 안부연락을 해오곤 한다.

가방 도매점을 운영하는 동대문시장준본당 총회장 최병태(요셉·62)씨는 일요일이면 동평화시장 인근에서 노점상을 운영한다. 시장준본당에서는 토요일을 주일처럼 지내기에 가능한 일과다. 상인들의 입장에선 이윤을 많이 남기지는 못하지만,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적은 돈으로 마음 넉넉함을 느낄 수 있는 장이 재래시장 노점상이기도 하다.

노점상이든, 재래 상가든, 새 단장한 쇼핑몰이든 외형은 다양하게 변화했지만, ‘동대문 시장’은 여전히 사람 냄새 짙게 풍기는 삶의 현장이다.

서울 동대문시장준본당 사람들

서울 동대문 시장, 청계천변에 자리한 ‘동평화시장’ 상가 정문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면 곧바로 딴 세상이 펼쳐진다. 시장 곳곳에서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귀를 먹먹하게 할 만큼 크게 울리는 음악소리는 일순 사라지고 근사한 성당이 눈앞에 드러난다.

100여 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큰 방’ 두 개로 꾸며진 성당이지만 서울 동대문시장준본당 신자들에게는 물론 시장을 오가는 이들에겐 그 어느 곳보다 넓고 따스하게 다가오는 쉼터다.

성당 문은 24시간 열려 있다. 지방에서 물건을 떼러 올라오는 상인들도, 장보기에 나선 소비자들도 누구든 언제든 잠시 쉬어가거나 기도를 하며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 덕분이다. 또 수·금요일에는 오전 6시,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각각 오후 6시와 오전 10시에 평일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토요일에는 오전 6시와 11시에 특전미사가, 주일에는 오전 9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서울 동대문시장성당(주임 오은환 신부)은 이곳 상인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상가 안에 자리 잡은 신앙의 요람이다.

주·야간 24시간 돌아가며 일하는 상인들은 이곳 성당에 머물며 틈만 나면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과 대화하고 어려운 이들도 돌볼 수 있게 됐다.

밤새워 일한 후 머리가 멍해져도 어김없이 미사를 봉헌하고 집에 돌아가는 신자들, 미사시간이면 가게를 비워두고 냉큼 성당으로 달려오는 이들의 열성에 시장준본당 주임 오은환 신부도 감탄할 정도다.

오 신부는 “대부분의 상인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하루 평균 17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지만, 미사전례와 레지오마리애 주회만큼은 누구보다 성실히 참여한다”며 “이젠 미사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이들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고 전한다.

게다가 시장준본당 신자들은 하루하루 힘들게 돈을 벌지만, 어려운 이웃들과의 나눔만큼은 아낌없이 실천한다. 특히 그들의 삶터인 시장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드러내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고 있다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선교사로 파견됐음을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손님들에게 건네는 태도도, 말 한마디도 그리스도인답게 가꾸려고 힘쓰지요.”

동대문 시장에서 ‘성당 사람들’이 더욱 빛이 나는 이유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