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30) 죽음과 종말에 관한 묵상 ② : 종말을 향한 인간 실존 - 사멸성과 불사불멸성의 교차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입력일 2013-11-05 수정일 2013-11-05 발행일 2013-11-10 제 2869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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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구원의 확신만이 죽음의 공포 이겨내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 부활 신비는 곧 우리의 최종적 희망
고통 통해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기 때문
불멸성은 하느님과의 친교 통해 선사되는 기적이며 선물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한계 체험을 하게 된다. 인생의 중대한 고비에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게 되고, 때로는 깊이 낙담해 좌절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상처, 시험에서의 낙방, 사업의 실패, 건강의 악화, 그리고 가족과의 사별(死別) 등 어찌해 볼 수 없는 시련의 상황 속에 슬픔과 아픔을 느끼고, 깊은 상실감에 젖어 방황하게 된다. 오죽하면 불가(佛家)에서는 속세의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부르겠는가?

인간의 한계 체험

어쩌면 우리 인생은 풍랑이 이는 광대한 바다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물결치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살이인지도 모른다. 폭풍우가 다가오면 강한 바람과 높이 솟은 파도를 두려워하고, 살아남기 위해 온통 물에 젖은 상태로 안간힘을 다해 노를 저어가는 그런 고통스러운 여정이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라는 비유에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찾아오는 이러한 고통과 한계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미소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즉, 인간은 한계 상황에 부딪칠 때 자신의 실존적 운명에 대하여 매우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가장 최종적인 한계 체험은 바로 죽음의 문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킨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혼돈(chaos)의 상태로부터 우리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질서를 부여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의 역동성과는 정반대로, 죽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던 것을 다시금 존재하지 않게 혼돈의 상태로 환원시켜버리는 파괴적 힘이며 어두운 그림자이다. 죽음은 삶의 모든 성취를 무의미하게 좌절시켜, 인간의 온갖 꿈과 의욕을 빼앗아간다. 이 세상에서 많은 재산을 모으고 막대한 권력을 지녔어도, 혹은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쌓고 큰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죽음 이후의 세상에로 가져갈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완전히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진시황제(기원전 259~210)는 천하를 통일한 후 이 세상에서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실컷 누렸으나 딱 한 가지 획득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을 피해 영원히 사는 비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두루 멀리까지 보내어 이른바 장생불로초를 찾아다니게끔 하였지만, 끝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뭐가 그리 두려웠는지 아니면 죽음 이후의 세상 역시 지배하고 싶었는지, 수많은 토우(土偶) 병사들을 만들어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던 진시황제는 아마도 역사상 죽음의 문제에 대해 가장 집착했던 인물들 중 하나이다. 이렇듯 중국 황제들의 오래 살고자 하는 추구가 도를 넘어서, 연금술사들이 황제들을 위해 중금속 성분이 섞인 단약(丹藥)을 만드는 극약처방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복용한 황제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갔으니, 이러한 어리석음이야말로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손도 써볼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이다.

불사불멸성의 문제

여기에서 우리는 진시황제가 그토록 추구했던 ‘불사불멸성’(不死不滅性)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지금의 이 세상에서 아프거나 죽지 않고 그냥 이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일이 혹시 가능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과연 그것을 진정한 불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영생(永生)이나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종의 형벌적 상태가 된다. 현세의 고통스러운 삶 안에서 계속 죽음을 피해 도망다니는 비구원의 연속적 상태가 불멸성의 본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의 파괴적 힘 앞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유한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사멸성’(死滅性)은 마치 숙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사도 바오로는 이를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로마 8,20) 혹은 “멸망의 종살이”(로마 8,21)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인생의 고통과 한계 체험 속에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우리는 언젠가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의 운명이 극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죽음의 힘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역설한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사도 바오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강조한다. 지금 비록 어둠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오를 것임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긴긴 밤의 추위와 공포를 참고 견디어낼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현재의 시련이 지나고 나면 주님을 다시 뵙게 될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을 지니며 살았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시편 130,5-6)

진정한 불멸성의 체험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즉 인간 한계 체험의 가장 깊은 심연인 죽음의 과정을 필연적인 것으로 준비하고 수용하고 통과하면서도, 그 죽음 너머의 희망을, 그리고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참다운 불멸성의 체험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다.

사도 바오로는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고백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망이 되는 것은, 그분의 고통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곧 영원함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해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났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친히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는 곧 우리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희망이다.

베드로 1서는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희망에 대하여 증언한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3,14-15.18)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비참하고 나약한 인간 조건을 취하셨으며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불사불멸성의 의미, 즉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근거이다.

불멸성이란 인간 존재자에게 당연히 부여되는 속성이 아니다. 즉 어느 누구도 불멸성을 자신의 내재적 속성이나 당연한 권리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진정한 불사불멸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을 희망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모든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 “보라, 하느님은 나의 구원. 신뢰하기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이사 12,2)

결국, 우리의 종말론적 희망이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에 의해 구원받는 인간의 확신을 의미한다. 불멸성이란 내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 선사되는 기적이고 선물이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한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

는 말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알아주고 사랑해 주기 때문에 전적으로 사멸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랑이 영원을 지향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을 원할뿐더러 영원을 이루고 그 자체가 영원인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 박준양, 「종말론,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생활성서사, 2011, 18~26. 48~56쪽의 내용을 발췌하여 수정, 보완함.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학과 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