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8)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조직신학적 비판 ④ : 종교간 대화와 종교신학의 올바른 방향성에 대하여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입력일 2013-10-22 수정일 2013-10-22 발행일 2013-10-27 제 286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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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 보다 확신있게 선포돼야
 타 종교 전통들과의 진실한 대화에도 개방자세 필요
“영적빈곤 소외 호소하는 현대인들의 ‘울부짖음’ 발견
 예수 통한 참다운 구원 체험에 인도하는 사명 느껴야”
지금까지의 고찰은 필연적으로 뉴에이지(New Age) 사상과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 간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현대 종교신학에서 제기하는 고유한 전망들이 몇몇 뉴에이지적 요소들과 상호 교차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교신학이 매우 중요한 비중으로 강조하는 종교간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에 대하여 뉴에이지 운동 역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말한다 하더라도, 그 근본 배경과 맥락에 있어서는 결코 접합될 수 없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현대 종교신학적 흐름과 뉴에이지 운동은 어떻게 구분되며, 또 어떠한 접점에서 만나고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인가?

진정한 종교간 대화의 의미

가장 중요한 식별 기준으로, 뉴에이지 운동이 드러내는 혼합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종교간 대화와 협력,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종교적 운동의 진정성은 그것이 혼합주의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각 종교의 참된 신앙고백에 기초하고 있느냐에 따라 식별 가능하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와 인류복음화성의 1991년 공동 문헌 「대화와 선포」 48항에 따르면, 진정한 ‘대화’란 거기에 임하는 양편 모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종교적 신념을 버리거나 축소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종교간 대화의 진실성이란 서로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온전한 믿음의 자세로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근본적 원천을 구성한다. 진정한 종교간 대화는 자신의 고유한 신앙고백을 벗어난 혼합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혼합주의는 그 인위적 시도와 거짓된 속성으로 말미암아, 여러 다양한 종교전통들의 만남을 끝내는 모순적 대립과 분열, 기만과 상호 반대에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는 1990년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56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 종교의 전통과 신념에 충실하면서 대화는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꾸밈이나 편견 없이 진실하고 겸손하고 솔직하게 상대방의 종교 전통과 신념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원칙의 포기나 거짓 평화주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종교적 탐구나 체험의 여정을 함께하고 동시에 편견과 불용과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증언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간 대화 혹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다른 종교들과의 협력에 있어, 그리스도인은 보편적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그리고 그 구원사적 유일성과 궁극성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도전과 위협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은 근본적인 가톨릭 신앙안에 굳건히 머무르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전통들과의 진실한 대화 협력을 향해서도 개방돼 있어야 한다. 사진은 9월 30일 바티칸에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아시시 ‘세계 종교인 평화 기도회’ 참석자들을 접견하고 있는 장면.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자들의 임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마주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의 흐름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서구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는 아시아에서도 하나의 종교-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자 시도하는 중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적(靈知主義的) 밀교 성향을 보이는 광범위한 네트워크(network)라는 점에서 신영성운동(New Spiritual Movement)의 범주로 분류되며, 보다 조직화된 성격을 지닌 여타의 신흥종교운동들(New Religious Movements)과는 구분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New’라는 표현은 새로운 종교적 흐름의 형성을 도모하는 사회적 움직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종교사적 측면에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동양과 서양에서 여러 세계적 종교전통들의 주변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종교-문화적 요소들의 새로운 발흥과 이에 대한 재평가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재평가란 그러한 종교-문화적 개별 요소들에 대하여 그 본래적 의미를 왜곡하고 변형시키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절대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전체적인 공통점은 뚜렷한 혼합주의(syncretism) 경향을 보인다는 점인데, 그것은 마치 하나의 무지개처럼 세계 각지에서 유래하는 종교전통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 안에 모두 함께 포괄하고자 시도한다. 이처럼 상대주의와 혼합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적 움직임의 세계적 확산은 계시 사상에 기초한 그리스도교 복음선포 활동과 분명히 충돌하게 되며, 바로 여기에서 이러한 도전과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교회의 예언자적 임무가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자들의 임무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혼합주의적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뉴에이지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종교전통들과의 정당한 대화와 협력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와 인류복음화성의 1991년 공동 문헌인 「대화와 선포」 29항이 말하듯이, “타종교인들은 그들 종교전통 속에 있는 선한 것을 진실하게 실천하고, 그들의 양심이 가르치는 바를 행할 때 하느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설혹 그들이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선교 교령」, 3. 9. 11항 참조)”는 전망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지가 바로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자들의 임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화와 선포」 48항이 설명하는 것처럼 “계시의 충만함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졌다는(1티모 2,4-6 참조) 신앙 안에 굳건히 머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타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어떤 다른 방식을 통해서 나타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언명의 의미를 구원론적으로 올바르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해석해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자들의 주된 연구 방향이라 할 수 있겠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는 상대주의적 다원주의에 입각한 그의 입장이 뉴에이지 노선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스스로 입증해내야만 한다는 심각한 물음과 도전에 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약화시키거나 사실상 포기하고자 시도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몇몇 위험한 급진적 노선들이 이미 1980년대부터 출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여러 다양한 관점들로부터 접근하지만, 공통적으로 일종의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은 이러한 입장들의 위험성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이 현대 과학기술 문명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을 새로이 일깨우는 긍정적 역할도 했다는 주장을 설령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드러나는 불투명함과 불명료함은 그 실체적 파악을 어렵게 함으로써 매우 위험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그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관한 주장은 일견 매력적인 사상처럼 보일지라도, 끝내 그것이 인도하는 바는 혼합주의와 상대주의에 기초한 범재신론적 일원론이며,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의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뉴에이지 운동에 호응하고 추종하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상 과학기술 문명 시대의 영적 빈곤과 소외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적 자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그 어떤 염원과 ‘울부짖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서, 모든 거짓된 영적 유혹과 싸우며 진정한 신앙적 체험을 수호하고 증언해야 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 부각된다. 그러한 인간적 ‘울부짖음’과 염원은 뉴에이지의 불투명하고 위험한 혼합주의적 전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요한 14,6)에 대한 믿음과 체험을 통해서만 참으로 응답되고 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뉴에이지 운동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도전과 위협에 직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와 가치,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우주적 그리스도) 사이의 필연적 연속성과 상호 일치성, 그리고 구원 역사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널리 확신 있게 선포해야만 한다. 동시에, 다른 종교 전통들과의 진실한 대화,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종교간 협력과 봉사를 향해서도 개방되어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 그 ‘울부짖음’을 귀 기울여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혹시 거기에 방향적 오류가 있다면 이를 교정하고 정화하면서, 그들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다운 구원 체험에로 인도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과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교의신학적 관점에서」, 「가톨릭신학」 12(2008/여름), 한국가톨릭신학학회, 51~57쪽의 내용을 발췌하여 수정, 보완함.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학과 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