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지도 (5) 서울 혜화동

이지연 기자
입력일 2013-07-09 수정일 2013-07-09 발행일 2013-07-14 제 285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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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젊음의 거리 이면에 고즈넉한 신앙의 자취가 …
신학교·혜화동성당 등 한국교회 소중한 공간들 밀집
장면 총리 가옥에는 독실한 신자 흔적 생생히 남아
■ 여정

혜화역 1번 출구→가톨릭대 성신교정→혜화동성당→동성중·고등학교→장면 총리 가옥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그룹 동물원의 ‘혜화동’)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나가면 수많은 소극장을 안내하는 표지판과 그곳을 지나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술의 거리, 젊음의 거리 ‘혜화동’을 마주하는 첫 모습이다. 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추억과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역시 혜화동이다. 그 중심에는 가톨릭대 성신교정, 혜화동성당, 동성중·고등학교 등 70~8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공간들도 있다. 이번 ‘가톨릭지도’의 발걸음은 혜화동으로 향했다.

■ 젊음의 거리에 신앙의 뿌리가 내리다

번잡한 지하철역 주변을 지나 혜화동성당에 도착하자, 성당 울타리 사이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의 시원한 그늘이 행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역 출구부터 이어진 빌딩숲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혜화동의 ‘반전’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기자도 나무가 선물한 그늘 밑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이내 혜화동 첫 번째 여정지인 가톨릭대 성신교정으로 향했다.

혜화동성당 후문과 혜화 유치원 사이 골목으로 50m정도 올라갔더니 성신교정 정문이 보였다. 주님의 목자를 양성하는 공간인 만큼 성소주일과 직수여식을 제외하고는 ‘외부인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었다. 출입을 위해 관리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면서, 이곳이 ‘성’과 ‘속’의 국경은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 전 방학을 맞아 고요한 교정 안에서 온갖 소음은 사라지고 새소리만 들려왔다. 도심 한 복판에서 명랑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교정을 안내해준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이자 교학처장인 전영준 신부는 “아침에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알람을 대신할 정도”라고 말했다. 게다가 성 베네딕도회 백동 수도원 터와 가르멜 수녀원 옛터 등 교정 곳곳에서 만나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흔적은 이곳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장소임을 알려준다.

최근 혜화동의 상업화로 인해 성신교정은 각박한 인심을 경험하고 있다. 인근에 상가들이 많이 들어선 탓인지 신학대학 야외행사를 하면 경찰서로 바로 민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성’의 공간인 성신교정마저도 메말라가는 세상인심을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전영준 신부는 “혜화동에 신학교가 세워진지 70여 년인데, 이곳이 점차 상업주의에 물들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며 “또한 여기에 신학교가 있는지 모르는 주민들도 많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전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의 말씀처럼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혜화동성당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올라가는 길. ‘외부인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이곳은 번잡한 혜화동 중심과는 달리 고즈넉하다.
1937년 설계된 장면 가옥 마루에는 장면 총리가 앉았던 흔들의자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 잣나무골에 심은 신앙의 씨앗

성신교정에서 맑은 공기와 새소리를 들으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나니 절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바로 교정 앞에 있는 혜화동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종조의 공신 조은이 이곳에 잣나무를 많이 심고, 그 사이에 백림정을 지었다고 해서 유래된 ‘백동’을 붙여 백동본당이라고도 많이 불렸다.

2006년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성당은 예술의 거리에 위치한 성당에 걸맞게 아름다운 성미술품으로 가득했다. 작품의 규모도 그렇지만 참여 작가들의 이름만 들어도 이곳이 성당인지 전시장인지 헷갈릴 정도다. 성당 정면의 큰 벽면에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1986) 선생과 동료, 제자 조각가들이 함께 제작한 ‘최후의 심판도’로 시작해서 이남규(루카, 1931~1983) 선생의 유리화, 이종상(요셉) 화백의 성녀 소화데레사상, 최봉자 수녀의 감실 등 어떤 작품 하나 눈길을 뗄 수가 없다. 특히 이종상 화백이 1994년 제작한 성수대 위에 못 자국이 선명한 예수 부활상(임영선 교수 제작)을 얹은 합작품 ‘부활성수대’는 성당에 들어서는 신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하지만 성미술품만으로 서울대교구에 세 번째로 설립된 혜화동본당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성당은 항상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의 안식처다. 평일 오후, 미사가 없는 시간에도 성당을 찾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기자도 그들과 함께 성당에 앉아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청했다.

전시 관람을 위해 혜화동에 왔다는 채 라파엘(40)씨는 “세상이 변하듯 혜화동도 정말 많이 변했지만 성당만큼은 변하지 않고 제 자리에 있어주니 이렇게 찾아와 기도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고 말했다.

혜화동성당의 성모 마리아상과 장미꽃.
혜화동성당은 성미술 작가들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가득하다.

■ 신앙의 뿌리에서 피어난 꽃

가톨릭대 성신교정과 혜화동본당의 신앙뿌리는 동성중·고등학교에서 꽃을 피운다. 1907년 소의학교로 개교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학교이기도 하지만 자율형 사립고로서 가톨릭 교육 이념을 실천하는 학교로 거듭나고 있다. 아직 방학 전인 학교에는 학생들이 운동이 한창이었다. ‘진리와 사랑’이라는 교육 이념 아래서 학생들이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명문 학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동성고 100주년 기념관에 ‘혜화아트센터’를 개관, 예술로서 지역 주민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발걸음은 다시 흘러 혜화동주민센터 근처에 있는 ‘장면 가옥’으로 향했다. 장면(요한) 전 총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제4대 부통령으로서 한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이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재속프란치스코회에 입회, 한국 진출까지 도왔을 뿐 아니라 성 원선시오, 혜화동본당 평의회 회장,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교장 등 한국교회 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나 익히 들었던 인물, 장면 총리의 가옥이 지난 3월 대중에 개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갔다. 가옥 안에는 장면 총리가 앉아있을 법한 흔들의자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통령과 총리를 역임한 약력에 비해 가옥은 너무 소박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집 안에 기록된 장 총리의 업적을 읽고 다시 한 번 놀랐다. 특히 독실한 신자였던 그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장 총리의 깊은 신앙심이 묻어나는 묵주와 십자고상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장면 총리 가옥에서 만난 이기원(29)씨는 “장면 총리가 가톨릭신자였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게 됐다”면서 “그 분의 유품에 숨결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해 이곳 가옥에서 장면 총리를 직접 만나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장면 총리 가옥 방문을 마지막으로 ‘혜화동’ 여정을 마쳤다. 이번 여정을 통해 화려하고 젊음의 열기로 가득한 혜화동의 고즈넉하고 고요한 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3월부터 대중에게 개방된 장면 가옥에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장면 총리의 손때가 묵은 묵주가 전시돼 있다.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정신적 고향인 가톨릭대 성신교정.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