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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23) 노개영의 성인 신부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3-05-07 수정일 2013-05-07 발행일 2013-05-12 제 284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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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들 마저 존경하고 따르게 만든 한 사제는
그들의 고통과 분노 덜어주고 먹을 것도 나눠
15년 동안 노개영에서 노동한 오응풍 신부.
노개영에서 가톨릭 신부들이 겪은 고초에 대해서도 각종 증언들이 이어졌다.

안휘성 군천호 국영농장 노개영은 그야말로 전율을 느끼게 하는 노개영이었다는 증언들도 이어졌다. 이 노개영에 승려 한 명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 심지어는 그의 이름도 몰랐다고 한다.

그 승려는 수인들의 인도자였다. 군천호 국영농장 노개영에는 수많은 수인들이 있었고, 48명이 한 조가 되어 함께 지냈다.

48명 중에는 호걸로 불리는 승려와 사상범, 정치범도 있었으나 강도들과 부녀를 성폭행한 범죄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도 그 승려는 존경했다고 한다.

1955년 노개영에 끌려온 그 승려는 몸이 매우 수척한 노인이었다. 무술도 할 줄 모르고 남과 싸우는 일도 없었다. 그는 매우 인자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으며, 말수가 적었고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노개영에서 수인들이 분노로 뇌성벽력처럼 화가 치밀어 사람을 치거나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승려는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오른손을 머리에 얹고 그는 기도를 하는 듯 하였는데, 그럴 때면 수인들의 불 같이 올라왔던 감정과 고통이 차츰 가라앉고 진정이 되었다.

수인들이 누드 사진을 보거나 음담패설을 늘어놓을 때에도 그 승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수인들은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드러눕기 바쁜데, 그 승려는 구석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 듯 했다. 어느 수인이 승려에게 “어르신네께서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하고 묻자 승려가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이 상태가 가장 편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자세로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승려는 의학을 모르는 사람 같았지만, 수인들 중에 병이 나면 늘 간호를 해주었고, 임종에 가까운 사람이 있으면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임종을 하면 두 눈을 감겨주었다.

노개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음식을 적게 주어 배가 고픈 것이므로 수인들이 말하기를 “우리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힘든 노동이 아니다! 매를 맞는 것도 아니고 배가 고픈 것이다.”라고 했다.

1년 365일 중에 배부르게 먹는 날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식사시간이 되면 승려는 자기 음식의 3분의 2를 다른 수인에게 덜어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나는 늙어서 위가 작아요. 당신들은 젊어서 많이 먹어야 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함께 사는 수인들은 그가 그렇게 말하므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승려가 풀밭에 앉아서 야생풀을 씹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수인이 그 광경을 보자 승려는 즉시 먹던 야생풀을 버렸고, 수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 승려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후에 수인들은 그가 승려가 아니고 신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인들 중 몇 명은 세례도 받았다. 신부는 얼마 있다가 선종했다. 수인들 중에는 의사가 있었는데, 의사 수인이 말하기를 신부의 사망 원인은 아사라고 증언했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