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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17) ‘또 다른 괴로움, 전염병’

서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3-03-26 수정일 2013-03-26 발행일 2013-03-31 제 2839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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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들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고통으로
병실에 환자가 넘쳐나고 수없이 죽어나가
노개영에서 15년 동안 노동한 채석방 신부.
무순감옥은 담이 높고 담에는 고압 전기가 흐르는 전망(電網)이 쳐있었으며 전망을 끊으려다 발각되면 즉결 처분됐다. 이곳에는 장기수들도 많았다. 또 과학자, 기사, 대학교수 등 과학 인재가 많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순감옥에 화학공장이 있었는데 그것을 404호라고 불렀으며 여기서 원자탄 만드는 원소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여러 개 공장에서 수인들은 밤낮없이 돌아가며 전기난로와 밥솥 등의 제품을 비롯해 철로를 만드는데 필요한 갖가지 부품들을 생산해야 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베트남과 알바니아, 아프리카에까지 수출이 됐다고 한다.

공산당들은 때때론 수인들 중 우파분자로서 사상이 개조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을 한여름 뙤약볕이 내려 쪼이는 곳에 온 종일 세워뒀다. 그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물 한 모금 주지 못하게 해 동료 수인들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감옥에 전염병이 돌면 하루에 100여 명씩도 사망했다.

요녕성의 경우는 중국의 공업기지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대약진운동 당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 청년들도 우파로 몰아 체포, 노개영으로 보내곤 했다. 젊은이들은 대만 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15~20년의 노개형을 받았다. 예를 들어 장(張)씨 성을 가진 대련공학원 2학년 학생은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게를 그려놓고 옆에 “이 녀석! 언제 모로 갈 거야!”라고 써놓았는데, 그것 때문에 체포돼 15년의 노개형을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또 대약진운동 때 수인들은 평소 한 달에 걸쳐 내놓던 생산량을 단 하루에 만들도록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이에 따라 수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자다를 반복하는 생활을 했다. 잘 먹지 못할 뿐 아니라 잠도 자지 못한 수인들의 얼굴은 모두 황색으로 변하고 몸은 수척해졌으며, 눈도 움푹하게 들어갔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 수인들의 다리에는 부종이 생길 뿐 아니라 사지가 무력해지고 어지러워져 작업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식사도 멀건 흰 죽 조금과 옥수수 한 개 정도가 전부였다. 이런 음식을 받은 수인들은 날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감옥 안 병실에는 환자가 넘쳐났는데, 감옥에는 약도 없고 양식도 콩가루 조금씩이 전부여서, 수인들은 모두 중환자가 되어가고 또한 수없이 죽어나갔다. 하지만 공산당은 남은 수인들에게 정신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염려해, 죽은 이들을 낮에는 매장하지 못하게 하고 한밤중에 가마니에 담아 인근 야산에 한꺼번에 매장시켰다. 시신을 가마니에 담아 트럭에 쌓아 실으면 마치 양곡을 쌓은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수인들 중에는 가족이 먹을 것을 우편으로 보내주는 이들도 있었는데, 배고픈 수인들은 이런 음식도 서로 약탈해 먹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