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87) 함께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융화’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입력일 2013-03-12 수정일 2013-03-12 발행일 2013-03-17 제 283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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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를 변화하는 공동체 안으로 불러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 경계하고 이해의 자세 필요
모든 스포츠에는 감독 혹은 코치가 있다. 운동은 선수들이 하지만 그 선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들의 역할은 참으로 크다. 똑같은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라고 해도 감독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감독 혹은 코치가 선수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강압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연히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단기간 혹은 일시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삶은 길다. 긴 페넌트 레이스에서 한두 번의 승리로는 한국 시리즈 정상에 설 수 없다. 선수는 한명 한명이 모두 다르다. 취향, 능력, 가능성 등이 모두 다르다. 이들이 희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면서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물론 이런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 길의 이름이 바로 ‘융화’다. 융화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느님과 진정한 순명적 합치를 이룬 사람이 보이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백성들의 행복 구현이라는 목표는 같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려는 방법이 다르다. 공산주의는 강제적이고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어렵고 느리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즉, 완벽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상대방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융화의 힘이다.

본당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몇 명이 끌어가는 공동체는 ‘일사천리’(一瀉千里)일 수 있다. 하지만 ‘일사만리’(一瀉萬里)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고작 천 리를 가자고 영성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융화를 바탕으로 하는 본당 공동체만이 일사만리가 가능하다.

더 나아가 융화는 삶의 복잡함 속에서 그 흐름에 잠겨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영성신학은 매일의 삶의 흐름에 주목한다. 그 흐름 속에서의 수없이 다양한 만남들을 중요시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왜 그런가. 우연히 지나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해서다.

우리가 왜 만나는가. 이끌기 위해서? 나에게 이득이 되기 위해서? 아니다. 함께 하느님을 향해 손잡고 걸어가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렇게 상호 간에 서로 하느님의 창조 뜻에 맞게 형성시켜 줘야 한다. 형성되고 형성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상대방을 채워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상호형성이다. 이 상호형성이 안 되면 신앙 안에서의 융화는 불가능하다. 혼자만 잘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잘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 자녀, 내 가족, 내 직장을 중요시하기에 문제가 생긴다. 하느님은 내 자녀, 내 가족, 내 직장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같이 잘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부르신다. 수도회가 공동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적으로 볼 때 공동체 안에는 나 하나 잘났다고 하는 이들이 꼭 있다. 공동체는 융화의 힘으로 이들을 변화시키고 녹여야 한다.

이웃을 배려하는 융화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름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화는 법석을 떨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다. 왜 그럴까. 상대방을 알기를 원하고 배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끌고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끌고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야단법석을 떤다.

상대방은 하느님이 돌봐주는 사람이다. 하느님이 돌봐주는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끌고 가는가. 사람은 소가 아니다. 끌고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과의 합치도 이뤄지고 융화가 이뤄진다. 참 정신으로 융화의 삶을 살려는 사람은 장소와 사건, 사물들 안에서 배우기를 원한다. 이런 기본이 없으면 빌딩을 지어도 소용이 없다. 공든 신앙의 탑이 무너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융화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 갖고 잘해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융화가 아니다. 신앙 없이 평범하게 잘 사는 사람도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잘 대해 주는 이들이 많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족한 사람이고 누구나 다 하느님 안에 똑같이 평등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다. 내가 뭐 잘났다고 이웃을 돌보는가. 융화는 고통받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적선하는 것이 아니다. 몇 사람 도와주었다고 해서 잘난 척하고 하는 순간에 진정한 의미의 융화는 깨진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시련에 봉착한 사람을 도울 때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함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융화가 아니다.

융화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치에서 물이 넘쳐흐르듯 나오는 것이다. 우주와 이웃, 나를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뜻에 진정으로 순종해야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런 융화를 이룰 수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