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82) 영적으로 산다는 것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입력일 2013-01-29 수정일 2013-01-29 발행일 2013-02-03 제 2831호 1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영적 삶은 지속적인 ‘합치·연민·융화’ 가능케 해
주님과 진정으로 합치한 사람은 삶에 변화 나타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일까.

하느님은 육신적 차원에서 삶을 즐기라고 결혼 생활을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니다. 정신적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라고 결혼을 안배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육신적, 정신적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육신적, 정신적 차원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더 중요한 차원이 있다. 바로 마음, 영의 차원이 그것이다.

마음과 영적인 차원에서 결혼 생활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 의 신비를 감사하며 묵상하는 마음과 영의 결혼 생활이 중요하다. 그래야 정신적, 육신적 차원의 행복한 결혼 생활도 지속적으로 따라온다. 영적인 차원이 결여된 결혼 생활은 나 중심적 결혼생활이다. 이는 하느님 중심적 결혼 생활이 아니다.

결혼생활 하나를 예로 들었지만 이러한 삶의 태도는 우리의 삶 전반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직장 생활, 학창 생활 등 모든 것들에서 중요한 것은 영의 차원이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육신과 정신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이 가진 몸과 지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학교생활도 내가 정신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활이다. 영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영으로 학교생활을 하면, 정신과 육신은 영화된 정신, 영화된 육신으로 성화 되면서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영의 차원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이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신적 정신적 차원의 삶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인류 전체의 문제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부터 인간이 영적으로 살도록 이미 섭리해 놓으셨는데(이를 형성신학에서는 ‘선형성’이라는 단오로 표시한다) 인간은 그 섭리를 거스르고 오직 육신적 정신적 삶만 살아가고 있다. 눈에 보이고 감지할 수 있는 육신적 정신적 삶만이 전부라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영적으로 살 때 나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영적으로 살면 지속적인 ‘합치와 연민과 융화’가 가능해진다. 영적으로 살면 나의 삶 안에서 ‘합치와 연민, 융화’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세 가지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원하시는 참‘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합치와 연민, 융화에 관련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세 가지는 나를 둘러싼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나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하느님과 합치이고, 이웃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연민이고, 세상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융화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역량을 펼치며 영적으로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동서남북 모든 차원에서 창조 섭리를 완성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 하나! 합치와 융화와 연민 역량 네 가지는 올이 하나라도 빠지면 망가지는 옷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하느님과 합치한다고 해서 내가 태어난 창조 섭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연민만 실현한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도 아니다. 하느님과 합치한다고 해서 이웃에 대한 연민, 세상에 대한 융화를 구현해 내지 못한다면 이는 하느님 뜻과 조화된 공명의 삶이 아니다. 합치한다고 해서 가정은 버려둔 채 산과 기도원으로 전전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진정으로 합치하면 연민과 융화는 따라온다. 거꾸로 말하면 이웃에 대한 연민, 세상과의 융화가 없는 하느님과의 합치는 완전한 합치가 아니다. 혼자서 하느님과 일치한다고 들떠 자랑하는 ‘자뻑 합치’다.

하느님과 진정으로 합치한 사람의 삶은 이웃을 향하는 눈과 말, 귀, 손길이 달라진다. 세상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합치는 삶 속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융화를 이루고 이웃에 대한 연민이 있다고 해서 합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완전한 융화와 연민이 아니다. 완성된 연민과 융화는 하느님과의 합치를 드러내는 증거다.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늘 귀를 기울이고 늘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이 진정으로 연민으로, 융화로 가득하게 된다. 또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상태에서의 융화는 선택적 대인 관계만 갖게 한다. 형식적 차원에서 그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연민의 마음 없이 하느님과 합치를 이루고 아무리 세상과 융화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껍데기 연민이다. 결국 합치와 연민, 융화는 하나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왜 건조하고, 불행하다고 느껴지는지 아는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엄청난 땀을 흘렸는데도 왜 나의 삶이 자꾸만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지 아는가.

하느님과 합치하지 않고 연민과 융화만 이루려 했기 때문이다. 연민과 융화는 제쳐놓고 하느님과의 합치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합치와 연민, 융화의 세 바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의 삼위일체 세발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갈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