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80) 하느님은 고요함 속에 일하신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입력일 2013-01-15 수정일 2013-01-15 발행일 2013-01-20 제 282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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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뜻 무엇인지 잔잔히 생각하는 것 필요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 아닌 ‘인간 세계’ 가르쳐야
인간은 위대하다.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불쌍하다. 하느님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래서 인류 역사 이래로 깨달음 근처에 도달했던 똑똑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부처님이 그랬고, 공자님이 그랬다. 소크라테스, 엘리야 예언자 등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연민 가득했던 분들이었다.

실제로 우리 중 완전한 사람은 없다. 신부도 수녀도 스님도 목사도 완전하지 않다.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스텔라)도 완전하지 않다. 육신적 차원에서 볼 때 김연아 선수는 자신의 분야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세계 최고의 능력을 받았다. 물론 정신적 차원에서도 스스로 수많은 노력과 연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육신과 정신만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육신과 정신만으로 세상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이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잔잔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육신적 소질, 정신으로 재능을 키우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고요하게 나 자신을 영적으로 승화시킬 때 진정한 완성이 가능해진다. 세상 만물과 나 자신을 형성하시는 신적 신비와 고요히 만나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영이 강해야 한다. 몸, 정신, 영의 삼중 구조의 종합적 능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 낼 수 있다.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높은 뜻을 구현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합치할 수 있고, 이웃과 일치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와 일치될 수 있다.

영적인 능력을 키우는 것,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은 초월적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내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이는 불가능하다. 하느님은 고요함 속에서 일하신다.

고요함의 초월적 시간을 가지지 못할 때 고통이 찾아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월적 시간 안에서는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중심에로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우리가 사니까 고통의 사건들이 체험되는 것이다. 고요함의 초월적 시간을 가지게 하기 위해 고통이 섭리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장소가 성체 조배실이다. 활동의 동력은 고요함 속에 있다. 성당 청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청소 행위는 고요한 초월적 시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성당 청소를 하기 전에도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미사 전에도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왜 많은 시간을 들여서 피정을 하는가. 본당 업무, 수도회 업무가 중요하다면 그 시간에 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피정을 특별히 정기적으로 시간 내서 하는 이유는 고요한 초월적 시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지 못하면 정신적 육신적 차원의 에너지는 쉽게 고갈된다. 불평불만이 많은 성직자나 수도자를 가끔 볼 때가 있다. 늘 지쳐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초월적 시간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다.

이는 평신도도 마찬가지다. 본당 공동체가 성장하려면 초월적 시간을 보내는 평신도들이 많아야 한다. 본당 사목자는 그래서 신자들을 내적으로 편안한 초월적 시간을 갖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성 위의 본당이 된다. 시장 바닥보다 더 소란스러워질 수 있는 곳이 성당이다. 초월적 시간의 부재는 성전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초월적 시간을 특별히 마련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봉헌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정신적 시간, 즉 역할적 시간에만 매몰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꼭 움켜쥐고 남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내가 쓸 시간도 모자란 데 어떻게 남을 위해, 더 나아가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중고등학생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공부에만 매달려 살아간다. 학교와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기에 바쁘다. 이렇게 정신적 시간만 사용하고 영적인 초월적 시간에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 당연히 초월적 시간을 체험하지 못한다. 나 중심적으로 살게 되고 이기주의와 경쟁의식에 매몰된 삶을 살아간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잃은 삶을 살고 있다. 불쌍하지 않은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금 인간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는지, 아니면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창조의 뜻에 맞도록 아이들을 길러 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고요한 진리의 초월적 시간을 체험하게 하려면 우선 우리 자신부터 초월적 시간의 충만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래서 우리도 초월적이다. 이렇게 초월적인 우리들이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초월적 시간을 갖는 사람은 그 삶이 달라진다. 넘쳐나기에 저절로 이웃에게 베풀게 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