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77) 정신과 육체 활동에 의미 부여하기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입력일 2012-12-24 수정일 2012-12-24 발행일 2013-01-01 제 2826호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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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삶은 성당 안에 갇혀 있지 않아
모든 일상 주님 향하면 영적 의미 지녀
공명적 삶, 하느님 뜻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삶은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 매몰돼 있는 우리들의 삶을 영적, 마음적 차원으로 한 단계 더 깊게 해준다.

육신과 정신적 차원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영의 차원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육신과 정신에 매인 삶에서 한 단계 더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에 초월적 깊이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초월적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성당에만 많이 다닌다고 해서 가능할까. 아니다. 성당에는 가야할 시간에 그곳에 있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집에서, 산책길에서, 식사하면서 이뤄져야 한다. 초월적 삶은 좁은 울타리 성당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만나는 초월적 시간들은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것에 대한 현존으로 반영된다. 일순간에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예를 들면 미사에 감동적으로 참례하면 하루 혹은 일주일, 혹은 수년이 지나도 그 체험의 느낌이 지속된다. 완성된 아침기도를 하면 그 기도의 기운이 하루 종일 지속된다. 완성된 성체조배를 구현하면 일주일을 하느님 품 안에서 지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하느님을 향하는 초월적으로 이뤄지면, 일상이 모두 영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성관계 자체에만 몰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성관계는 일시적 쾌락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관계 후 사랑의 충만을 체험하고 하루가 하느님 안에서 풍요로워지는 것이 영적 생활이다. 초월적 성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더욱 나를 생동감 있게 길러주시는 것에 대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초월적 감정을 지속시켜야 한다.

밥 먹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하느님을 더 찬미할 수 있다. 먹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많이 먹는다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눈을 혹사시키면 충혈 등 부작용이 따른다. 입으로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많이 말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지속’이다. 밥 먹는 것도 먹는 행위 자체로 그치는 사람이 있다. 밥 먹는 활기참을 주신 감사함을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신을 통한 역할적 시간은 일시적으로 의미가 있다. 육체를 통한 생체적인 시간도 일시적으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육체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면 일시적인 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시간이 다가온다는 점이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을 잘하는 것으로 그치면 일시적 의미만 지닌다. 하지만 자신의 운동을 신앙과 연결시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을 나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김연아의 삶은 초월적 시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마음과 영이 아닌 정신만 사용할 때 우리의 영적 체험은 그 깊이가 얕아진다.

생일 파티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신만 사용해도 우리는 충분히 멋있는 파티를 준비할 수 있다. 음식을 준비하고, 이벤트를 마련하고…. 하지만 그런 파티는 알맹이가 없다. 자녀를 위한 기도, 삶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함께하는 파티가 승화된 초월적인 것이다. 깊이가 달라진다.

정신이나 육체적인 것에 매달려 있으면 공명의 시간, 하느님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그런 시간이 나를 피해간다. 마음과 영은 항상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신과 육체에 가려 발흥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정신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수없이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섭취하지만 그 고기의 화학적 성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영양분이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내 몸 안에서 흡수되고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자동차를 운전하지만 자동차 구조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장님이다.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신비에 휩싸여 살아간다. 그나마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른다고 쩔쩔 매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모르기에 기쁘다. 모르니까 조금씩 신비를 알아가는 것이 기쁜 것이다.

모르는 것을 하나둘 찾아가고 깨달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우리가 완전하면 하느님이 계실 필요가 있겠는가. 모르니까 하느님을 믿을 만 한 것 아닌가. 우리가 몰라도 하느님이 제대로 다 돌아가게 해 주시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사는 것 아닌가. 이것이 믿음 아닌가.

나와 이웃과 세상이 잘 되도록 하느님이 꼼꼼히 섭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희망하고, 살아있는 동안 좋은 방향으로 형성적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고 초월적 삶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