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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오 신부의 사랑의 둥지 행복의 열쇠 (59) 송영오 신부의 가정이야기 ⑧ 신부의 딸 (상)

송영오 신부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12-09-25 수정일 2012-09-25 발행일 2012-09-30 제 281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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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동동, 이런저런 잔소리에 담긴 ‘아빠 마음’
우리가 늘 갈 수 있는 곳, 우리가 없으면 우리를 그리워하는 곳, 우리가 죽으면 슬퍼해주는 곳,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12년 전 뇌출혈로 아무말도 없이 세상을 떠나간 작은형에게 평소 입버릇처럼 둘째 아이는 내가 키우겠다는 했는데 어느날, 이곳 안양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조카딸 로사가 인덕원을 찾아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빠를 잃고 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다소 반항적인 기질을 지닌 로사는 어린 시절부터 아빠보다 삼촌인 나를 더 잘 따랐다. 고향을 떠나 낯선 이곳 안양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잘 견디어 주었고 스스로 인터넷을 뒤져서 여기저기 백일장에 참가하며 상을 타오는 모습이 제법 대견하기만 하였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고 밤늦게까지 과외공부와 문예창작학교를 오가는 고된 생활 속에서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방황하는 모습을 알면서도 사제생활이 바쁜 나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고 조카딸을 데리고 있다는 것을 신자들이 안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쉬쉬하며 살아갔다.

모든 것에 잘 적응해 준다는 것이 고마우면서 한편으로 바빠서 관심을 보이지 못한다는 미안함을 이것저것 잔소리로 늘어놓았고 신부의 조카라는 부담감을 주면서 아이에게 스트레스와 강박감을 주었다. 다른 여자아이보다 유독 머리에 신경을 쓰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 많은 머리핀을 선물해 준 내게 탓이 있으면서도 멋을 내는 아이를 야단했고 용돈도 헤프게 쓴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피어싱(piercing)을 한다고 코를 뚫고 나타난 조카딸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고 밤늦게 남자친구를 만나 과외를 땡땡이 친다거나 늦는 일이 많아지면서 우리 서로의 관계는 점점 냉전과 대립의 관계로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친딸 이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로의 갈등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고 바빠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어도 서로의 책상에 미안함과 사랑의 편지가 오고 갔다. 몸이 아파 조퇴를 하고 방에서 끙끙 앓을 때는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없는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고 밤늦게 과외공부를 마치고 아이를 차에 태워 돌아오는 길에는 나도 아빠 노릇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수학능력시험이 다가올수록 초조와 불안, 긴장감으로 잠 못 이루는 딸아이를 위해 도대체 신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2학기 수시를 준비하면서 딸아이의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1학년 때부터 그렇게 염원했던 D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지원하기 위해 담담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러 갔고 합격한 다음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글짓기 시험주제가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면접을 하는데 질문이 왜 이름이 ‘로사’인지를 묻는 것이었다고 하니 이것이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있는 딸이기에 늘 준비했던 주제이고 삼촌이 신부이니 종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얘기했을까.

합격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다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동안 서로에 대한 오해, 그리고 갈등과 대립은 오늘의 합격을 위한 변주곡에 불과했고 로사와 나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신부인 내게도 세상에서 더 없이 사랑하는 나의 딸 로사가 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간다. 아무튼 조카딸 덕분에 가정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로서 자녀와의 관계를 진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특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송영오 신부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