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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 25 생명윤리와 윤리원칙 3

소병욱 신부ㆍ대구효성가톨릭대교수
입력일 2012-09-03 수정일 2012-09-03 발행일 1995-10-08 제 1973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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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규범 거부할때 그른 양심판단 발생
올바른 습관 형성으로 이완된 양심 벗어나야
노예제도가 사회의 기본구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을 때는 노예를 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선각자가 나타나 노예해방을 부르짖었다면 그는 그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구조 자체를 뿌리부터 파괴하려는 죄인으로 몰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는 노예들 자신조차 해방을 거부했을 것이다. 당신의 경제구조로 보아 주인집을 떠나서는 먹고 살기조차 막연했을 것이므로.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좋은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인 섬기라고, 주인은 종들을 협박하지 말고 잘 대해주라고 말했지 종을 해방시키라고 말한적은 없다(에페 6, 5~9). 바울로뿐 아니라 예수님도, 그외의 어느 사도도 노예해방 운동을 벌인적은 없었다. 바울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사이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라고 말하며 아내들에게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말했다(에페5, 21). 물론 바울로의 사상전체를 살펴볼 때 그가 인간평등사상을 지녔다는 것은 확실하지만(예: 에페 6, 9) 그는 당대의 정신문화와 사고의 발전단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윤리적 성장의 법칙, 자연법의 역사성).

이러한 시대에 어떤이가 노예제도의 죄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또는 남여평등을 몰랐다고 해서 그의 양심을 인간 평등이라는 윤리가치에 둔감한 맹목적 양심이라고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의 전체 흑인부족들 중 70%가 일부다처를 공인하고 있는 사회이다. 남녀평등을 극단적으로 거스르는 제도가 일부다처제라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여성을 인격적으로 모역하는 죄중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 이지만 실상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무지몽매를 즉각 일깨운답시고 일부일처를 열심히 권고, 실현시킨 서양 선교사가 있다면 그는 남편들이 내보낸 수많은 아내들을 평생 먹여 살릴수 있단 말인가? 그 이전에 그가 가정파괴범으로 몰리지 않았으면 다행일것이다.

우리는 지난주 연재에서 어떤 행위를 선택, 결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행위가 참으로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올바르게 또한 확실하게 판단(정당한 판단, 확실한 판 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예제도나 일부다 처가 죄악인줄 모르는 문화권의 한 개인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잘못이 없이 그릇된 판단과 행위중에 사는 양심이 있을수 있다. 이럴 경우의 양심을 극복 불가능한 오류적 양심(invincible erroneous conscience)이라고 말한다.

죄는 행위의 본질을 알때 성립된다. 모르고 한 짓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에도 종류가 있다. 위의 예처럼 타 문화권의 사람이 일깨워 주든지(문화교류), 수 많은 세월과 함께 그 문화권내에서 스스로 깨닫든지(자력성장), 또는 그 두가지 모두가 동시에 이루어 져서 죄스런 관습을 벗어나기 이전에는 해방될수 없는 무지도 있을수 있고(불가항력적 무지), 한 개인의 직무상의 나태, 윤리 도덕적 생활에 대한 노력부족, 윤리가치에 대한 습관적인 주의부족 등으로 오는 무지(가항력적 무지)도 있을수 있다. 따라서 양심의 상태도 불가항력적인(극복 불가능한) 오류적 양심이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오류에서 벗어날수 있는 상태에서 잘못된 행위를 했다면 그에 대해서는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의사가 새로운 의료지식을 얻는데 게을러서(직무상 나태)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면 그는 극복 가능한 무지의 상태에서 행동했으므로 잘못을 범한 것이다.

잘못된 양심의 판단(가항력적 오류적 양심의 판단)은 자신의 판단이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 지켜야 하는 윤리규범(객관적 윤리규범)에 맞지않게 이루어지는 경우를 두고 말한다. 어떤이가 어떤 행위에 대해 양심의 판단을 할 경우에는 그 행위가 옳은 행동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즉 윤리적 인식이 선행된다). 그런데 이 인식이 잘못 되었을 때 양심판단은 그르치게 된다. 「태아는 아직 세상에 나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아니다」라는 틀린 인식을 할 경우에는 「그러므로 낙태를 해도된다」라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되고 그 판단에 따라서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잘못된 인식(무지)에 대한 책임이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이유로 자신에게 있다면 그 책임의 정도에 따라서 죄성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치료비도 못낼 가난한 환자라고 해서 적당히 서둘러 진찰을 하여 오진을 일으키고 그 결과 환자가 죽었다면 가치에 관한 그 의사의 잘못된 양심판단(물질주의)이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결과를 일으켰으므로 그의 책임은 막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올바르지 못한 윤리적 판단(주로 악한 행위를 악한 행위를 악하게 여기지 않는)은 선, 가치에 대해 일부러 눈감아 버리는 습관을 형성하여(맹목적 양심의 상태) 자신의 양심을 완전히 느슨한 상태(이완된 양심, lax conscience)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일 수가 많다.

아무 근거없이(또는 충분치 못한 근거를 가지고)큰 죄를 소죄로 여기거나 죄스런 사항을 죄로 여기지 않는 양심의 습관을 형성했을 때 그러한 양심에서 나오는 판단과 행위는 오류에 빠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찾아 나서는 노력과 함께 어떤 양심 판단도 가장 안전한 노선에서 하는 습관을 형성하여 이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완된 양심은 극복이 가능한 오류적 양심을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스스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기민한 양심으로 변화될 수 있다.

소병욱 신부ㆍ대구효성가톨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