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말 명순례지 특선] 16 구합덕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8-28 수정일 2012-08-28 발행일 1995-06-18 제 195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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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만 남은 옥터…바람만 썰렁
다블뤼 주교 등 성직자 피신처
달레 교회사 원사료 집필한 곳
붉은 양철지붕의 초라한 신리공소…유적보존 자체가 기적
가톨릭신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성지 순례
주말에 떠나는 순례의 발걸음을 이번 주에는 서해와 인접한 충남 당진군으로 향한다.

충청도 내포지방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였다. 우리가 찾아갈 곳은 이 내포평야에 복음의 횃불을 밝혀 온지 올해로 1백 하고도 다섯 해를 지난 구합덕 본당과 신리공소, 그리고 수많은 선조들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한 면천의 옥터와 동헌의 흔적이다.

승용차로 20부 남짓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적지들은 버스가 뜸해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에는 조금 불편하다. 일단 합덕이나 당진까지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큰 불편 없이 다니지만 그곳에서부터는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나을듯하다.

구합덕 본당이나 신리공소, 면천사적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성지로 개발되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많은 순례객들이 찾지는 않고 있다.

유서 깊은 신앙터전

더욱이 면천 지역은 옥터와 동헌자리가 면천국민학교 내에 있었으나 현재는 교사(校舍) 신축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려 사실은 순례자가 와서 선조들의 숨결을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학교 내 유물관에 당시 현판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합덕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오다 보면 길 오른편에 길 쪽을 앞으로 하고 비탈길 위에 서있는 유서 깊은 구합덕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1백5년이라는 신앙의 경륜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구합덕본당의 전신은 양촌본당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1890년에 설립, 초대 퀴틀리에 신부가 부임,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제7대 페랭(Perrin’ 백문필(白文弼)) 신부가 6.25때 납치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현재 성당 구내에 있은 백신부의 묘소는 그의 유체는 없이 유물만이 묻혀있다. 페랭 신부 재임시인 1926년 예산본당, 35년 서산본당, 38년 당진본당이 각각 분리, 신설됐고 제8대 박노열 신부때 신합덕 본당이 분리됨에 따라 합덕본당은 구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성같은 성당 우뚝

도톰한 언덕배기를 올라서면 신록이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빨간 벽돌과 2개의 철탑으로 세워진 고성(古城)같은 성당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다만 조금 튀는 색감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이 거슬리는 듯 하지만 선조들이 전해준 신앙의 숨결이 배어 있음인지 조금도 경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마음을 경건히 하는 순례자의 자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성당 일을 돕던 신자 몇이 잔디 위에 앉아 소박한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은 그 옛날 숨죽이며 믿음을 지켜오던 당시의 조심스런 몸짓들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면서 다시 한 번 순교 성인들이 피로 닦은 신앙의 터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성당 오른편 성모 마리아의 모아 잡은 손 뒤로 오늘의 성당이 있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어온 네 분 신부의 묘소가 보인다. 순교성인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신앙으로 이 지역의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했던 성직자들의 묘소 앞에서 잠시 묵상에 잠기는 것도 좋을 듯.

구합덕 본당에서 택시나 승용차로 20분 남짓 달리면 신리 공소를 찾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물이 없어 택시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야 한다.

볼품없는 신리공소

20~30평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신리 유적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마당의 돌 하나하나 건물 안에 깔린 나무판대기 한 조각 한 조각 마다에 당시 신앙선조의 땀방울 기도소리 숨죽인 발걸음의 흔적이 가득 배어있는 듯하다. 마당에는「순교자 현양 기념비」와 성모상이 서있다. 이 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까지 할만하다.

1866년의 병인 박해 때 다블뤼 안 (Daveluy) 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곳으로 이곳에는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해방 후 양철지붕으로 개량해 소강당으로 꾸몄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브와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 이 집에는 안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를(Verolles’ 방(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상서(上書)였다.

순교사 연구의 요람

신리 유적지에서 다시 택시나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면천국민학교가 있다. 버스가 있다지만 한참 걸어 나와야 하고 그나마도 워낙 배차간격이 뜸해 기다리자면 한적이 없다.

초기 한국교회의 사적지인 면천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조선조 정조 때로 「내포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포교활동으로 다른 지방보다 신자수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였던 김진후 (金辰厚)도 면천군수를 지낼 당시 이존창의 영향으로 교우가 됐다.

정조 때 첫 복음 전파

현재 면천군 성상리에 있는 면천국민학교가 당시 조종관 (朝宗館), 곧 면천 군청의 동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천국교 자리에는 옛 동헌과 옥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교사 신축과 동시에 모두 없어져 아쉬움을 남기고 다만 학교 유물관에 상량보와「풍악루」(豊樂樓)라는 군청 문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서해안에 인접한 합덕과 면천 지역은 주위에 많은 성지와 명소들이 분포돼 있다. 홍성, 해미, 솔뫼 등이 근접해 있어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이들 중 하나를 연결해 함께 돌아볼 수도 있다. 또 덕산 도립공원고 온양, 도고, 덕산 온천 등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도 있고 만리포, 봉산포, 대천 등 많은 해수욕장이 있다.

국토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숨결을 함께 맛볼 수 있도록 오는 주말에는 충청도 지역의 성지를 찾아 떠나자.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