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제1회 생명의 날 담화 (전문)

서정덕 주교
입력일 2012-08-27 수정일 2012-08-27 발행일 1995-05-14 제 1953호 1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올해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3월 20~24일)에서 매년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기로 정하셨습니다. 생명의 날은 오늘의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이루기 위한 모두의 책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을 재인식하면서 「인간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받들도록」 모두 다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생명에 대한 현실적 위협

1. 불행히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인종청소, 테러와 폭력, 인신매매, 인재사고 등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낙태와 인간배자에 대한 비윤리적 실험, 안락사와 같은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행위들이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어른들뿐 아니라 청소년들도 이러한 생명 경시 풍조에 젖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약물중독, 본드흡입, 폭력서클 조직 등이 늘고있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이 점점 마비되어, 인간 생명의 근본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순간적 만족과 개인의 편의만을 추구하고 「존재」보다 「소유」를 더 중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낙태와 안락사를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있습니다.

실제로 입법 기관들이 무구한 생명의 살해를 허용하는 법안을 의결하고, 정부가 이러한 범죄 행위를 방임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의료인의 역할도 일부 전도되어, 생명에 봉사하기 보다는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에 가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께 대한 의식이 실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의식을 잃어버릴때, 인간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생명은 하느님 선물

2.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10. 10).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지상에서의 당신 사명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2천년의 역사 동안 교회는 언제나 이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전파해 왔습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거룩하고 불가침적입니다. 또한 생명은 항상 선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고 당신의 모상으로 지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이는 생명에 대한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께서 손수 밝히신 복음입니다. 그런데 죄가 죽음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선물로 주어진 생명의 본질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생명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생과 수난,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성취된 구원은 생명을 영원의 높이까지 들어올림으로써 그 가치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신적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셔서, 인간이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언제나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위협받고 멸시받으며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사람들편에서 복음을 외칩니다. 현대 세계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복음화는 잉태의 순간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불가침의 생명권 선포를 간파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위한 모두의 책임

3. 우리 모두는 인간 생명의 존엄을 수호하고 실현할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양심 안에서, 가정안에서, 사회 안에서 인간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존엄성과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입니다. 수태에서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적이고 고의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언제나 지극히 부도덕한」 행위이며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죄입니다.

이제, 부모들은 생명의 협력자임을 자각하고 의료인들은 인간생명의 봉사자임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또한 입법자의 첫째 임무는 입법 기관으로 하여금 인간생명을 수태 순간부터 보호하도록 노력하는 것임을 재인식하여야 합니다. 만일 법이 인간의 존엄성을, 그 기본적이고 첫 번째 권리인 생명권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법은 법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는 생명권을 전제하는 인간 존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적인 다수결의 원칙에 대한 언급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 특히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윤리적 토대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생명의 문화 창조를 위한 사명

4. 교회는 생명을 선포하고 기리며, 생명에 봉사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생명의 복음이 전달되고 사회전체의 구석구석까지 그 복음이 파고들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사랑의 봉사를 통해 성취되고, 사랑의 봉사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생명을 맞아들이고 양육하며 기르고 부양하며 병들 때 보살펴주는 「생명의 성역」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신비에 특별히 가까이 다가서 있는 사람은 바로 여성들입니다. 여성들은 생명의 수호자가 되고 생명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도록 매우 특별한 과업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헌신적인 자기 희생과 기꺼운 봉사로 이러한 과업을 완수할 때 생명은 그 풍요로움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사회 전반에 이르기까지 참다운 문화 변혁이 일어나도록 「생명의 문화」증진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 문화는 모든 개인, 특히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고통과 죽음의 신비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필요로 합니다.

5.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생명의 백성이요 생명을 위한 백성입니다. 다가오는 2000년은 구세주가 강생2000주년으로서 대희년입니다. 희년을 준비하면서 우리 모두 생명의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생명을 위해 헌신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기꺼이 응답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과 생명의 문화 창조에 다같이 힘써야 하겠습니다.

(1) 먼저 우리 자신들이 생명을 침해한 잘못들은 깊이 참회하며,

(2)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불가침적 생명권을 널리 홍보하며 증거하고,

(3) 가정, 교회,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생명 존중의 교육을 실시하며,

(4) 각자의 신분과 능력에 맞게 생명 수호에 적극 동참하여야 하겠습니다.

1995년 5월 3일

서정덕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