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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돈 수녀의 - 진복팔단 해설묵상] 10 (끝)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입력일 2012-08-27 수정일 2012-08-27 발행일 1995-04-16 제 194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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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는 『예수 제자들』의 표지 
예수는 박해 받는 자들의 본보기
박해의 고통 감내할때 천국약속 
십자가와 죽음 통한 부활과 새생명 가르쳐 
“복되어라, 의로움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5,10)

이 행복칭송은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9절)」과 깊은 관련이 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과 「박해를 받은 상황」은 활동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말하고 있으며, 박해는 그같은 자세의 결과 내지 반응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마태오의 진복선언에서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 이 행복칭송, 즉 박해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표짐임을 말해 주고 있다.

박해원인은 의로움

박해의 원인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의로움이다. 즉 올바른 행위 또는 옳지 못한 행위 또는 옳지 못한 행위를 대적하여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힘쓰는 것이다. 이미 지혜서들은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종, 메시아를 암시하는 가운데 의인의 박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지혜서2, 10-21: 5, 1~9: 15~23).

「의로움 때문에」 받는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충성때문에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슬퍼하지 말고 박해 받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 하고」「신명내고」, 주님의 제자답게, 종말론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답게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 많기」때문이다(12절).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에게는 그들에 앞서 고통과 박해를 당한 참 예언자들에게 주어졌던 위로의 몫이 주어진다.

예수의 제자들은 구약에서 하느님의 대변자들, 예언자들이 받은 것과 같은 박해를 체험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 공동체는 구원역사의 길에 함께 하면서 그들의 주님과 같은 운명을 체험한다(마태2, 13: 16~18: 21, 33~39: 23, 37이하).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이신 예수 역시 그의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고(13, 57), 예루살렘에서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다. 「그분 때문에」 제자들은 고통과 박해를 참아 받으며 (하느님께로부터) 「하늘에서 큰상」을 기대한다. 이 행복칭송은 제자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뿐아니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마태5, 44). 예수께서 요구하신 「원수사랑」은 모든 시대와 상황안에서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박해를 받음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예수의 제자들의 몫이다(마태10, 22 ㆍ24~26). 박해속에서 복음의 힘이 증명되고 예수를 따름이 진실되다는 것이 또한 증명된다(19, 38이하: 16, 24이하: 요한 15, 20: Ⅰ베드로1, 6이하: 3, 13).

박해자 위해 기도해야

예수께서 의로움 때문에 배척, 모욕, 비난, 희생을 당하셨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박해를 받으신 예수는 박해받는 자들의 본보기가 되셨다. 예수만이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받은 박해만이 「불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 과오, 탓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령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불의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정의 의로움에 투신하는 자는 부당하게 고통을 받거나 박해를 당할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때로는 사랑이 미움으로 응답되고 평화를 위한 선의의 뜻이 비웃음과 폭력으로 응답될 수 있다. 자비가 남용되고 진실이 악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호의만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인정 대신에 오해를, 성공 대신에 박해를, 추종 대신에 저항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스승이신 예수께서 오해와 박해를 당하셨듯이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도 당연히 그길을 걸어가야 한다. 우리가 마음의 가난을 실천하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또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거나 용서, 화해, 평화를 진실로 추구하면서 복음말씀을 살려고 한다면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는 갖가지 고통, 박해, 불의, 고독, 외면, 오해, 유혹 등의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복음실천 따른 대가

박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고」(루가 6, 22). 이처럼 박해는 단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박해와 폭행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아기 때문에 당하는 온갖 형태의 적개심, 압박, 괴롭힘, 불신, 오해 등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어떤 모양으로든 박해를 받는 사람은 고난중에 슬픔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함께 한다. 죽음에까지 이르게하는 고통은 흔히 그리스도와의 일치, 극치의 완성에로 이끌어 준다. 박해의 고통을 인내로이 감내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 천국이 약속되었다. 박해를 받는 자는 하늘나라의 행복스런 찬란함과 하느님의 크나큰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선물은 모든 고통이 끝나고 저 세상에서 누리게 될 완전하고도 행복한 풍요로움의 시작에 불과하다. 박해와 모욕과 낮추임을 받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에」 「기뻐하고 신명내라」는 것이다. 이 「상」은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큰 「하늘에서 상」은 항상 우리의 새로운 방향 변환속에서 (=회개) 주어지기로 약속된 것들이다: 하느님 자신, 그분의 나라, 하느님을 바라봄, 땅을 차지함, 하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 보이시고, 그들은 그분을 「실제 모습대로 (Ⅰ요한3, 2) 「바라보고」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다!

항상 새로운 회개요구

이 마지막 행복칭송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셨던가를 또 사명실천을 위해 고통과 박해를 감내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실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아들 예수의 깊은 충실과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얼핏 보기에 실패나 좌절로 보일지 모르지만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나감으로써(=빠스카의 신비) 십자가를 새 생명과 해방의 근원으로 변형시키셨다. 그러므로 이 행복칭송은 종말로 빠스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십자가와 죽음을 통한 부활과 새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것이 아닙니까? 』(로마8,17).

부활의 삶 살아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남몰래 새생명의 탄생을 위해 땅속에서 썩고 부서지는 아픔을 견디어 내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어둠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고, 부패해 가는 세상에 소금이며,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는 자들이다.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영광되이 부활하신 예수처럼 우리도 밀알이 되어 그분과 함께 죽음으로써 새생명을 기리고 노래하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쓰자!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