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미술의 해 기획특집] 가톨릭의 거장들 1 우석 장발(張勃)

박세원ㆍ토마스ㆍ한국화가
입력일 2012-08-24 수정일 2012-08-24 발행일 1995-03-19 제 1945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한국 서양화개척자… “영원한 화성”
1930년대 초창기 「목일회」주도
탈일지향, 민족미술 창달에 “큰 족적”
힘차고 폭발적인 운필로 추상표현주의 추구
가톨릭신문은「미술의 해」를 맞아 한국 화단의 빛낸 미술가 중 신자화백 10인을 시리즈로 소개하고자한다. 거장 10인의 생애, 신앙, 작품세계 등에 대해 그의 직제자들이 집필하게되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 미술사를 정리하고 그들이 교회미술에 끼친 영향을 알아본다. 한국미술계의 거장 우석 장발선생을 시작으로 김종영, 이순석, 김세중, 문학진, 김기창, 김형구, 변종하, 박득순, 김원 등 쟁쟁한 미술계의 거장들을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서양미술의 도입과 발전에 있어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며 활약상을 보여주었던 몇안되는 개척세대의 인물들이 눈에 들어 온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 수많은 화가들의 명성이 현재 거의 잊혀져가고 있지만 보기드물게 탁월한 미술이론과 창작활동으로 우리 화단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별로 자리잡고 있는 화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분이 우석 장발 선생이다.

우석은 1901년에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장면 박사의 실제(實弟)이기도 한 우석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파격적으로 가톨릭에 입문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탈전통의 문화적 분위기에 상당히 익숙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통회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서구적 회화양식에 남달리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절실한 가톨릭가정에서의 성장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던듯하다. 물론 이러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머물지는 않았다. 따라서 우석은 서양화에 대한 인식지평을 넓히기 위해 도일하여 동경 우에노미술학과에서 공부하였고 그후 더 본격적으로 서양의 조형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미국의 콜럼비아대학 미술과에서에서 유학하며 세계미술사의 조류들을 낱낱이 파악하고 돌아왔다. 1925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화단에서 그의 활동상황은 당시의 일본 유학파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대부분의 개척세대들이 일본에서 유학한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문화적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일본문부성전시회(문전)를 본따 1922년부터 실시한 조선미술전시회(선전)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 권위를 토대로 화단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던 것과는 달리 귀국후 휘문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미술인을 양성하기도 하였던 우석은 193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하였으나 선전을 철저히 외면하고 민족 미술가들에 의해 1921년 운영되어오던 서화협회전(협전)에만 출품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1934년에는 목일회의 동인이 되어 초기그룹활동의 선도적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초기이후 가톨릭성화를 많이 남기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종교적 열정과 경건한 신앙심으로 독특하게 승화된 미의식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성화가 일상생활의 리얼리티를 반영하기 보다는 표현의 시정에의해 호소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그의 미술이념을 단정적으로 규정 할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김 골롬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성당 소장)에서는 평면적 묘사와 고전주의적 대상접근의 인상을 받게 되면서도 그에 머물지 않고 투철한 신앙심으로 치명했던 두 자매의 순결한 기운이 캔버스 밖으로 스며나오는 듯한 청초미를 느낄 수 있는가하면, 「김대건 신부」에서는 단아하고 굳건한 기품과 의지가 중후한 마티엘 감각으로 신비스럽게 묘사되고 있어 그 장엄미에 머리숙이게되고 서울명동성당 제단의「12사도상」은 입체적이면서도 유기적인 화면 속에서 일종의 종교적 숭고미를 감지할 수도 있어 자신의 독특한 미적체험을 격조높게 표현해 내는 그의 역량에 감탄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이후 우석이 우리 화단에 기여한 공로들은 너무나 지대하므로 여기에 그 모두를 세세하게 거론 할 수는 없다. 다만 몇가지를 추린다면 1945년 8월에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여 일제의 영향에서 벗어난 민족 미술의 창달에 공헌하였고 서울시 학무관으로 재직하다가 1946년에는 춘곡 고의동, 군정의 문교부 고문과 이순석 선생과 더불어 서울대학교에 예술대학 미술학부를 창설하여 제2회화과(서양화과) 교수가 되어 정부수립 1년후인 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초대학장이 되었으며 같은해에 고의동, 이종우, 도상봉, 이병규와 더불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주도하였고 그후 1960년까지 6차례에 걸쳐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으로 활약하며 심사위원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단에 기여한 이러한 공헌으로 인해서 그는 1949년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50년대에 들어서서도 우석은 다른이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미술계에 거대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는 1953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 선임되어 1961년까지 연임하면서 「세계미술사」, 「서양미술사」등의 이론서들을 펴냈고 미술 기법과 이론을 가르쳐 현재는 이미 우리화단의 중진과 원조로 활동하고 있는 제지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1950년대 초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우석은 국전의 운영을 계속 주도하면서도 1955년에는 한국미술가협회를 창립하여 1960년까지 한국미협전을 개최하며 우리나라 미술계에 종합적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 민국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1961년 5.16 군사혁명이후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화단에서 우석은 공식활동을 중단하였으며 한국현대미술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만 1984년에 대한민국정부가 미술계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문화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자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노대가 우석이 미국 피츠버그에 거주하면서 펼친 창작활동은 한국 미술사에 일획을 그을정도로 중요하다. 이미 서구의 미술사조를 꿰뚫고 있었던 우석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시작됐던 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흐름을 이어 받은 앵포르멜운동에 공감하여 객관적 감각주의와는 다른 주관적, 직관적인 비정형의 조형미를 탐색하며 추상 표현주의의 세계를 일찍부터 구축해 왔었다.

추상표현주의로 표현될 수 있는 그의 최근 작품들은 색채를 극도로 절제하면서도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힘차고 폭발적인 운필 운용의 기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우주적인 발생론적 기원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추상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95세에 이르러 거의 1세기를 풍미했던 우리 서양화계의 거인 우석은 먼 이국땅에서 아직도 화구를 가까이 하며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이제 그는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겼던 거대한 흔적들도 또다른 시공속으로 파묻혀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서양화의 개척자 우석 장발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성좌들속에서 뚜렷하게 광채를 발출할 빛나는 별로 길이 남을 것이다.

박세원ㆍ토마스ㆍ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