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하돈 수녀의 - 진복팔단 해설묵상] 4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입력일 2012-08-23 수정일 2012-08-23 발행일 1995-01-29 제 1939호 1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하느님이 친히 “위로해 주심” 강조
악에 대한 진정한 슬픔 요구
회개눈물은 죄와 마음씻어
용기와 위로는 주님의 끊임없는 사랑 표시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마태5,4)

마태오는 이사야 61,1∼3에 의건한 이 행복을 진복선언에서 둘째 자리에 두었고, 루가는 셋째 자리에 두었다. 마태오는 「슬퍼하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루가는 「우는 사람들」이라 했다. 마태오는 보다 긍정적인 표현을 했으나 루가는 보다 부정적인 표현을 했다.『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아. 그대들은 슬퍼하며 울게 되리니』(6, 25). 그러나 두 복음사가 사이에서 의미상으로는 서로 다를 바가 없다. 슬퍼하는 사람은 그의 슬픔을 종종 큰 소리로 울음이나 울부짖음으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안에서의 예수는 약속된 메시아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이고 슬퍼하는 자의 위로자이며 포로들의 해방자이시다(61, 1이화의 루가 4, 18∼21). 슬퍼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위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그들에게 주어지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통해 주어진다.

약속된 위로

그러나 마태오는 여기서 과연 누가 「슬퍼하는 자」인지 분명하게 밝히고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여러해석들이 있다. 세상에서 하느님 백성의 상태에 대한 슬픔,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슬픔, 역사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의 세력에 대한 슬픔, 회개로 이끄는 회심과 같은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등, 즉 모든 인간적인 비참에 대한 슬픔을 말하고있다. 슬픔에는 선한 슬픔과 악한 슬픔이 있다. 선한 위로를, 악한 슬픔은 악한 위로를 가져다 준다.

끊임없는 사랑표시

여기서 행복칭송이 의미하고 있는 슬픔은 절제와 희망을 동반한 슬픔, 그래서 풍요하게 하고 성장을 촉진시미는 구제된 슬픔이다. 구제된 슬픔은 내적가난과 마음의 자유에로, 또한 참된 굶주림과 목마름에로 이끄는 행복들을 준비시켜 준다. 내적 가난은 덧없고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이 세상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해방한다. 우리가 잃으면 잃을수록 슬퍼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좌절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영원한 재산에 마음을 두게되고 우리의 아낌없는 혹은 조건없는 사랑과 헌신이 요구된다. 우리가 이를 얼마만큼 해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리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희망과 위로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어진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한단계 한단계 더 깊은 충실로 향할수 있도록 은총의 위안을 주시지만 우리는 거듭거듭 거절하거나 뒤로 물러서곤 한다. 우리는 역사의 비극이나 교회가 걸어 간 고통의 길에, 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냉혹하게 거절하는데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우는』(골로사이 1,24)우리 구원자와의 고동체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또한 세상의 풍파속에서도 주님이 배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분은 한 동안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어나시어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마태오 8,23∼27). 것세마니와 골고타는 거듭거듭 역사의 흐름안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활에로 이어진다.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I 고린토 13, 12)하느님을 만나기까지 올바르게 살아갈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위로를 주심은 그분의 끊임없는 사랑의 표시이다.

회개하는「좋은 눈물」

선한 슬픔과 악한 슬픔이 있듯이 좋은 눈물과 나쁜 눈물이 있다. 나쁜 눈물은 원한, 분노, 미움, 복수 등에서 나오는 눈물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일 수 없다. 이런 눈물은 상처받은 오만, 이기심과 시기심에 찬 탐욕, 실패한 야망, 악의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런 눈물은 위안을 주거나 마음을 달래주기는 커녕 오히려 냉혹하게 만든다. 나쁜 눈물은 신뢰도, 뉘우침도 없는 절망의 눈물이다. 반면에 좋은 눈물은 고뇌의 눈물, 동정과 영민의 눈물이고 마음의 고통을 진정시킨다. 좋은 눈물은 기도와 간구의 눈물이다. 구약성서안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로써 기도하고 하느님의 위안과 응답을 받았음을 본다(유딛 13, 7:i 1,10참조). 예수께서도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히브리 5, 7). 회개의 좋은 눈물은 우는 이의 죄와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준다(루가 7, 38). 의인의 눈에서 솟아나는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다. 그러기에 고통의 눈물이 아닌 한없는 기쁨의 눈물이다. 좋은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개방시킨다. 좋은 눈물은 은총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악의 세력에 대한 진지하고 고통스런 슬픔, 진정한 슬픔이다. 악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려는 곳에 계시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리스도인은 악이 선을 통해서, 사탄이 하느님을 통해서 극복됨을 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신앙인에서 위로를 받는다. 기쁜소식이 더욱 심화되고 동시에 마음의 슬픔들을 극복케 한다.

위로 받게될 날 선포

하느님은 작고 겸손한 자에게 위로를, 즉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주신다(마태오 11, 28∼30). 메시아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소식을 가져오듯이, 주님은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슬퍼하는 모든 이들이 위로를 받게 될』날을 선포하신다(이사야 61, 1이하). 슬퍼하는 자들은 「영으로 가난한 자들」과 같다. 그들은 고통과 마음안에 품고 있는 걱정과 찌르는 듯한 아픔의 부르짖음을 하느님앞에 가져오는 자들이다. 세상에는 눈물이 많다. 고통과 울부짖음이 바다처럼 깊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슬픔, 재산이나 명예를 잃어버린 슬픔, 이로 인한 좌절과 운명, 이 모든 것들 배후에는 깊은 고통과 슬픔이 있다. 그것은 세상의 잃어버린 상태에 대한 슬픔,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이 더 이상 소용없음에 대한 슬픔이다. 그것은 볼 수 있고 깨어있는 사람만이 가지는 슬픔이다. 이런 자는 자기 자신의 고통스런 운명만을 보지않고 혼란과 고통에 찬 온 세상안에서 넓게 바라볼줄 안다.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