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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돈 수녀의 - 진복팔단 해설묵상] 3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입력일 2012-08-22 수정일 2012-08-22 발행일 1995-01-22 제 193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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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모든것 맡긴 “가난” 강조
내적포기 통한 가난한 마음 중요
「염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버려야
회개통한 영혼 육신의 완전한 변화 요구
“복되어라ㆍ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태53)

마태오의 진복선언에서처럼 루가(6,20b)도 「가난한 삼」을 행복한 자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행복한 자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에 「영으로」라는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희랍어 「프노이마」란 바람, 숨결, 정신 특히 성령, 영적인 것을 뜻한다. 영(Spirit)은 「인간의 내면」「인간의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가난은 인간의 근본자세 또는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마태오의 가난은 내적가난이며 그것은 하나의 가치요 덕이다. 그것은 제자들을 인간화하고 해방한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며 예수를 따르기 위한 조건이다.

예수 따르는 조건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소식을 선포하셨다(루가 4, 18:루가 7, 22). 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셨다(이사야 61, 1). 구약시대에 가난한 사람은 존경을 받지못했다. 재산과 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재산을 가지지 않는 사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자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시편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 그분의 특별한 자비를 입는 자임을 볼 수 있다. 이같이 「가난한」사람은 그의 운명을 새롭게 보는 것을 배운 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등한시하거나 위축감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재물에 대한 그의 결핍은 오히려 그에게 정신적인 부와 하느님 앞에서의 자유와 겸손과 기대의 풍요함을 가져다 준다.

가난한 사람은 그의 희망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 두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께 의존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창조주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해야만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의 행위가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참모습을 알게 될때 비로소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 겸손한 자, 작은 자, 빈자, 즉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참겸손만이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최우선적인 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이며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손에 완전히 맡기는 자이다. 어떠한 삶의 변화, 역경, 모순 앞에서도 결코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 그분의 나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마음의 문을 연다. 그의 최우선적인 부는 예수요, 그분의 복음에 담긴 가치들이다.

이 첫번째 행복은 나머지 다른 행복들의 뿌리이다. 마태오는 여기서 가난의 기본자세, 가난이라는 덕의 뿌리를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곤궁스런 상황속에서 사는 사람들, 궁핍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 수고와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마태오 11, 18)을 치유하고 병호해주고 도와 주실 분은 예수뿐이시다.

내적포기 가능

그분의 주 의도는 내적인 회개, 사고를 바꾸는 것(metanoia) 태도를 새롭게 가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는 오로지 회개를 통해서 주어진다. 회개는 영혼과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변화이다. 이전의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는 것은 위대한 변화, 방향전환, 회개이다. 그러나 이같은 회개나 회심은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다. 그러나 인간편에서도 하느님을 위한 새로운 삶에 대한 깊은 갈망, 열망을 가져야만 한다. 회개는 일회적인 또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매일매일 그리고 거듭거듭 새로이 하느님의 은총속에서 되풀이함으로써 심화되어야 한다.

마음의 가난은 내적 포기를 가능케 한다. 포기는 포기한 것보다 더 귀중한 가치들을 희망하는 데서 비롯될 때 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곧 자유와 사랑을 심화하기 때문에 해방하고 인간화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인 가난에서 중요한 것은 포기 그 자체가 아니라 포기의 동기이다. 즉 예수의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의 실재 및 이미 참여하고 있는 그 나라의 부에 대한 확신이다. 마음의 가난은 필연적으로 물질적인 가난과 구체적인 형태의 초연함,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양식을 통해 표현된다. 실질적인 가난이 따르지 않는 마음의 가난이 따르지 않는 마음의 가난은 환상이고 공허일 뿐이다.

마음의 가난과 내적 포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요건이다. 그러나 마음의 가난이 지향하는 물질적 가난은 순전히 상대적인 것이다. 외적으로 가난한 생활양식은 바로 내적인 가난의 자세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데 방해될 만한 모든 것들, 즉 물건, 사람, 상황, 계획, 직장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내적인 가난,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외적인 가난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가난 혹은 마음의 자유를 얻은 가난한 사람을 행복한 자라고 하셨다.

완전한 변화 요구

이 행복칭송은 인간의 깊은 변화 혹은 근본적인 정화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이 세상 것에, 유한한 것에 대한 부자유함에서 내적 자유에로 인도한다. 동시에 하느님 나라 혹은 초월적인 것에, 무한한 것에 닫혀진 마음을 열게 한다. 비움이나 정화는 우리를 내적 가난으로 또는 마음의 자유에로 인도한다. 또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준비시킨다. 예수께서는 물질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셨다. 다만 물질을 의지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가 버려야 할 집착의 대상은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버려야할 것은 「염려하는 마음」이다. 예수의 산상설교의 핵심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신뢰하며 맡기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즉 이런 자세는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 사랑에 맡기는 삶의 자세를 가르킨다. 더 나아가서 이 삶의 자세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자리에 들어간 자는 하느님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사랑은 비어있는 영혼속에 흘러 들어온다.

정하돈 수녀ㆍ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