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인꼴라 마리에」문태준 단장의 활동체험기] 21 어느 자매의 죽음

입력일 2012-08-22 수정일 2012-08-22 발행일 1995-01-22 제 193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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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리지에서의 「인꼴라」활동 레지오는 나의 모든것
과로로 쓰러져…대세 기도 연도
냉담중인 남편 불교식장례 고집
■92년 7월 15일

지난 11일 토요일 밤 8시경에 임정님 자매의 이마에 물을 부으며 십자가를 그었다. 『임 마리아 막달레나, 내가 당신을 씻기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노라』

그녀의 평소생활을 통해 알게 된 입교원의에 따라 무의식중에 있는 환자에게 조건부 대세 예식을 거행했다. 마침 자리를 비운 남편이 이 예식에 참석치 못했다. 예식 후 울드레야에 참석하여 강의를 마치고 그 남편을 만나려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 시간은 밤 11시가 지났다. 4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의 응접의자를 메우고 있는 다섯분의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직감으로 남편임을 깨달았다.

『내가 조금전 대세 예식을 집행한 문 바오로 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면서 당연히 그가 기뻐하고 고마워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반응은 정반대였다. 뿌루퉁한 그의 표정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등 너머로 스님을 보면서 비로소 무언가 짐작이 갔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에게 우선 시간이 늦었으니 응급실로 가서 그녀를 위해 기도를 바치자고 이끌었다. 같이 간 앵커리지 본당 꾸르실리스따 10여 명과 레지오 단원들이 함께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를 에워싸고 조용 조용히 기도를 바쳤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주일미사 참례를 위하여 성당으로 가던 길목에서 그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임 형제! 어린시절에 세례를 받았다지요?』『예, 중 3때 받았습니다』『그러시면 50년대 후반이 되겠군요』『예, 그렇습니다』『참으로 걱정이 많으시겠군요. 산소 호흡기를 떼면 절명하신다니 얼마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는 대답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임형제! 어쨌든 소생하지 못하시면 장례를 어떻게 하실런지요? 천주교식으로…』『아닙니다. 문선생님, 저는 어릴 때 세례를 받긴했지만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고 요즈음은 특히 불교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래서…』

즉 우리들의 과잉 친절이나 걱정하여 찾아와 주는 것도 반갑지 않다는 투의 말과 표정이었다. 그는 상당히 장기간 동안 냉담중이었다.

『임형제! 당신이 영세할 시절만해도 우리 천주교는 입교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기업합니다. 문답책을 다 외워야했고 부모의 승낙이 있어야 하며, 엄한 찰고에 합격해야만 세례 받을 수 있었다고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토록 엄격한 관문을 통과하고 영세한 신자가 오늘날 불교가 뭐 어떻다구요? 말도 안됩니다. 전후 사정은 제가 잘 모르겠지만 부인은 이미 대세 예식을 통해 세례받은 우리 천주교 신자요, 하느님 백성입니다. 만일 숨을 거두시면 임선생과의 세속에서의 부부 인연은 끝나는 것이고 이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우리와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인을 불교식의 장례식을 치르도록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천주교 예식으로 부인을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할 책임이 있으며 또 세례예식을 집행한 저로서는 꼭 그렇게 하도록 권하고 또 원합니다』

그후 권 엘리사벳(본당회장 부인) 자매는 대모를 섰기 때문에도 더욱 천주교식으로 장례식을 치르도록 무척 애를 쓰고 환자가족이나 친지들을 만나면서 여론조성을 하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이튿날 월요일 아침 8시 40분에 담당의사는 산소 호흡기를 떼어 버렸고 임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는 한 많은 한평생을 40대 중반에서 마감하고 그 시신은 장의사로 옮겨졌다. 7월 11일 아침에 쓰러져(뇌일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13일(월요일) 아침 8시 40분에 산소 호흡기를 떼었으니 만 이틀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7월 15일(수요일) 오후 5시에 불교식으로 장례식을 치르도록 결정이 났다. 권엘리사벳 자매(대세 예식때 대모)와 나의 노력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교식 장례를 치르기 전 1시간은 우리들에게 시간을 할애한다는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천주교식 공식 추도예절을 불교 신자 등 여러 조문객들에게 소개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철저히 예절식순과 추모조사를 준비하고, 오후 3시 30분에 에버그린 장의사로 갔다. 꾸르실리스따 형제자매 여러분과 레지오단원 여러분이 장의사를 거의 가득 메우고 4시에 추도 예절이 시작되었다. 식순에 따라 경건하게 장례 성가를 부르고 연도 바치고 애도의 자유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권자매가 추도사를 하며 온 장내의 조문객들을 울렸다.

신자들이나 무종교의 외인들도 많은 감명을 받았는지 예식후 나에게로 다가와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들을 해주었고 스님 또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후에 알았지만 임형제는 그 부인이 계를 타서 무리하게 일본 식당을 인수했고 그 계원들이 모두 불교 신자들이라 결국 빚준 사람들이 불교 신자니까 그분들의 권유를 뿌리칠수 없어 불교식으로 했단다. 장례가 끝난 일주일 후인 7월 22일에 임형제의 업소로 가서 점심을 나누면서 빚갚는 요령을 잘 설명해주고 여러 가지 위로하며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를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잘 알았기에 이해한다고 위로했다. 그리고 매년 7월 21일은 죽은 임자매의 세례명인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이라고 알려주면서 이제 그 축일이나 혹은 49제와 탈상 때와 기일에는 꼭 위령 미사 바치고 또 그분 자신도 성사보고 신앙생활로 새로이 출발하는 인생이 되도록 간곡히 권유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고 흐뭇한 웃음을 웃는 모습을 뒤로하고 그분과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