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공의회는 진행 중… 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16) 동방 가톨릭교회들에 관한 교령 「동방교회들」

정리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2-07-03 수정일 2012-07-03 발행일 2012-07-08 제 280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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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안의 일치’ 실현하려는 교회 노력 대변
로마 중심적 모습서 가려진 지역교회 다양성 강조
보편성 원칙 통한 교회 일치의 당면과제 실현 촉구
1.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가톨릭교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계속해서 전하도록 열두 사도들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신 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안티오키아를 거쳐 당시 정치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열두 사도와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가며 로마제국의 박해를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 대제 이후 오히려 제국과 밀접한 관계 안에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며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 정치 제도로부터 교회 역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문화·정치적 이유에서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게 되었을 때 교회 역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비잔틴교회와 라틴교회로 각기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물론 교회는 전 세계 주교들의 모임인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요 보편적인 교회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관되게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전할 수 있었지만, 언어를 비롯한 문화와 정치적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던 두 교회는 반복되는 오해와 갈등을 거쳐 점차 분리의 길을 가게 되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이전에 이미 수 차례의 파문과 화해가 이루어졌었고 1204년 서방교회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 점령지가 아닌, 동방교회의 중심이라 할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그곳에 라틴 총대주교좌를 설립하면서 1054년의 상호 파문은 실제적으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두 차례에 걸친 공의회(리옹 1274 피렌체 1439-1441)를 통한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서방교회는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폐막에서 상호 파문을 취소하며 화해의 길을 모색할 때까지 대부분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지내게 되었다.

동·서방교회가 갈라지기 전 고대교회에서는 오랜 전통에 따라 다섯 개의 총대주교좌가 자리를 잡아 전체 교회의 삶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 순교지의 영예를 지니고 있었던 로마교회, 안드레아 사도의 복음 선포에 기초를 둔다고 하는 콘스탄티노플교회,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웠던 안티오키아교회, 사도 베드로의 제자인 복음 사가 마르코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교회, 그리고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예루살렘교회 등이다. 이 중에서 로마교회 만이 서방교회에 속했다.

로마교회는 역사 흐름 안에서 서방의 다른 지역교회에 대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로마교회의 관습과 전례가 서방교회 전체 안에서 수용되었고, 로마교회는 서방교회 안의 다른 지역교회를 보호·감독하는 독자적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동방에 있던 다른 네 개의 총대주교좌를 비롯한 지역교회들은 각 지역을 중심으로 각기 자신의 고유한 예법과 통치 전통을 유지하며 주교들 사이의 협의체적 관계를 통해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서방교회는 로마교회와 동일시되었지만 동방교회는 지역과 민족 별로 그리스교회, 시리아교회, 이집트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에티오피아교회, 러시아교회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서 교회가 분열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에 직면해서 신학적, 또 정치적 이유에서 일부 동방교회는 서방의 로마교회와 재일치를 하게 된다. 로마 주교는 사도들의 으뜸이며 대표였던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 일치의 큰 책임을 지고 있었고, 일부 동방교회 역시 일치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정치적 위기에서 서방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이러한 화해의 모색 과정에서 동서 교회 사이에 있었던 적대적 입장 때문에 많은 동방교회들이 서방교회와 재일치를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으며 마로니트교회를 제외하고 각 개별 교회의 일부만이 기존 지역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로마교회와 재일치하게 되었다. 이를 동방 가톨릭교회라고 부른다. 이들은 동방교회이면서도, 즉 로마교회의 예법과 규율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예법과 규율을 지니면서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가톨릭 지역교회이다.

동방 가톨릭교회에는 대표적인 다음의 여섯 개의 총대주교좌를 비롯해 20여 개의 교회가 있지만, 그에 속하는 신자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콥트교회(20만 명), 안티오키아의 마로니트교회(600만 명), 안티오키아의 시리아교회(15만 명), 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예루살렘의 멜키트교회(160만 명), 칼대아의 바빌론교회(20만 명), 아르메니아의 킬리키아교회 등이다.

이들은 한편으로 가톨릭교회의 다양성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 이들은 1965년 이후로 추구되는 동·서방교회의 전반적 일치 노력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야기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동방 가톨릭교회를 다루는 것이 교령 「동방교회들」이다.

2. 문헌의 배경

1441년 피렌체공의회에서 몇몇 교회와의 일치를 선언한 이후 가톨릭교회는 다른 동방교회들과 재일치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상에 대해 언급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이 오랜 숙제를 해결하고 가톨릭교회 내에 존재하는 지역교회의 전례와 관습의 다양성이 교회의 옛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리며, 또 이를 통해서 교회 일치적 관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동방 가톨릭교회에 관한 교령을 준비하였다. 특히 서방교회 지역에로 이주한 동방 가톨릭신자들에 대한 사목 문제는 문헌의 실천적인 탄생 배경이 된다.

문헌의 대표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준비위원회에 총대주교들을 비롯한 여러 개별교회의 대표들이 참여하지만 그 결과 오히려 일치된 의결 도출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이 교령은 수많은 수정 작업 끝에 적지 않은 반대표를 얻으며(찬성 2110, 반대 39) 공의회의 제3차 회기 중에 통과 반포되었다. 교령은 기본적으로 동방 가톨릭교회와 그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일부 조항은 동방정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내용(5~6항)을 다룬다.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는 2007년 10월 가톨릭-동방교회 신학위원회를 열고, 이때 합의한 문서를 통해 최초로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했다. 사진은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모임에서 양 교회 대표들이 촛불을 켜고 있는 모습.

3. 문헌의 비판적 분석

교령은 도입 부분에서 동방교회를 언급하고 모든 지역교회의 평등을 장엄하게 선포하면서 로마 중심적 교회의 모습에서 가리워졌던 가톨릭교회의 협의체적 성격과 각 지역교회의 다양성을 강조한다(6항).

또한 같은 지역 안에 여러 교회법과 재치권이 공존하게 되는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서방교회 지역 안에 동방교회 신자들을 위한 본당을 설립할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4항). 이러한 내용의 반복은 ‘라틴화’라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견진과 고해와 혼인성사의 실질적 문제를 다루며 동·서방 가톨릭교회의 전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방 가톨릭사제의 권리를 서방교회에서도 포괄적으로 인정한다(13~18항). 갈라진 교회의 형제들과 이루는 관계(24~29항)에서는 동방정교회의 성사의 유효성을 인정하며 특히 고해·성체·병자성사에 있어 동방 가톨릭신자와 동방정교회 신자 사이의 성사 교류를 촉진하는 규정을 제시한다.

4. 문제점과 전망

7항은 동방의 총대주교 제도를 언급만 할 뿐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다. 너무 늦게 제안이 되어 충분히 다룰 시간이 없었지만, 사실 이 주제는 교회 전체 구조와 관련되며 동서·방교회 일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교령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여 가장 큰 아쉬움을 남긴다.

8항에서 총대주교좌의 서열을 언급하면서도 그 서열을 명시하지 못한 것 역시 문헌 작성 과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동방 가톨릭교회는 실질적으로 많은 제약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지역교회의 원칙에 따라 동방 가톨릭교회와 그 지역의 동방정교회는 공존 자체만으로도 불가피한 긴장 관계 속에 있으며 개종의 문제는 늘상 커다란 갈등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구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나서 서방 선교사의 선교 활동 때문에 동·서방교회의 일치 운동이 급속하게 냉각되었던 것은 이를 방증한다.

교령 24항은 동방 가톨릭교회가 동·서방교회의 일치 증진에 일익을 담당해 줄 것을 언급하지만 이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실상 막연한 기대 이상으로 보기가 어렵다. 또한 문헌 스스로도 이 문헌은 동·서방의 갈림이 없어질 때까지만 유효한 임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30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령은 가톨릭교회의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이상을 구체적인 역사의 조건 안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표현하며, 이를 보존하기 위한 가톨릭교회의 노력을 대변한다.

로마교회의 예법과 규율을 따르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볼 때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것이라 여겨지더라도 원칙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교회는 전 세계 모든 지역의 문화와 관습을 포용하며 바로 이로부터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이 도출된다.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교회의 이상을 동방 가톨릭교회라는 구체적 현실 안에서 실현하도록 독려하는 이 문헌은 보편성의 원칙과 이를 통한 교회 일치가 모든 가톨릭신자들에게 당면한 과제임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며 이 과제의 실현을 촉구하고 있다.

■ 신정훈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정훈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2001년 사제로 서품됐으며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 연희동본당 부주임을 거쳐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봉직 중이다.

정리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