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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는 진행 중… 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15)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해설

정희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2-06-20 수정일 2012-06-20 발행일 2012-06-24 제 280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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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엄성 근거한 참된 종교 자유 선포
모든 인간이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은 가톨릭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자명한 원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오랜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공의회가 개최되던 시기의 상황에서 보면 하나의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시 공의회에 참여했던 젊은 신학자 시절, 이 문헌의 선포가 교회 역사 안에서 ‘콘스탄틴 시대의 종언 또는 중세 시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종교 자유의 근거가 인간 존엄성 그 자체에서 기인되며(2~8항),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은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 근거한다(9~14항)는 공의회 선언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 선언은 타 종파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와 비그리스도교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가능케 했다.

즉,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공의회의 또 다른 문헌들인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과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 대해 일종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실제적으로 교회 안의 에큐메니즘 운동과 종교 간의 대화 노력들에 신뢰성을 부여하는 힘으로 작동됐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 안에서의 종교 자유 문제

종교 자유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종교 자유 문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반영하는 문제였다. 로마제국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는 종교 자유(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종교들을 물리치고 독점적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는 종교 자유의 문제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유럽 사회 안에서 한 국가 안에 하나의 종교가 있는 제도가 별다른 문제없이 지속됐다.

종교개혁 시기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군주의 종교가 그 백성의 종교’라는 원칙이 적용돼 종교 자유의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지는 않았다. 서구 역사 안에서 종교 자유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8세기 미국과 프랑스에서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초기 청교도 세대들은 수정헌법 1조에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명시했다. 종교 자유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러한 경험은 20세기에 종교 자유 문제에 대한 일종의 기초를 제공했다. 사실,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문헌에 대해 신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신학자는 미국 예수회 신학자인 존 쿠트니 머레이(John Courtney Murray)였다. 또 한편으로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 인격과 자유와 평등과 박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함으로써 종교 자유의 문제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경험은 유럽 사회 안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가속화시켰다.

종교 자유의 문제는 교회와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따라 그 해석이 조금 달라진다.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국가와 교회의 이상적인 관계는 국가가 하나의 종교(신앙)를 지지하고 신앙적 오류와 이단 그룹들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안에는 ‘오류는 권리가 없다(error has no rights)’는 신념이 내포돼 있다. 또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종교 자유 문제에 대해 교회가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교회가 소수자(minority)의 입장에 처해 있을 때는 강력하게 교회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했었지만, 교회가 다수자(majority)의 입장에 있을 때는 타자의(타종교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이 문헌에도 이런 전통적 태도가 남아 있지만, 이 문헌은 종교 자유가 신적 기원을 갖기 때문에 국가의 권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며(3항), 교회는 신적 사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13항).

높아진 인권 의식의 반영과 교회 역사에 대한 반성

전체주의에 의해 빚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럽인들은 민주 국가의 형성과 인간 존엄성 옹호가 중요한 문제임을 절감했다. 1948년에 발표된 유엔 세계인권선언은 종교 자유 문제 등을 포함하는 인권 문제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었다. 공의회 시기 유럽의 사상사적 흐름은 개별적 인간 이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인간 주체에 대한 관심(turn to the subject)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이해에 있어서 인간 주체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임을 또한 인식시켜 주었다. 인간 주체에 대한 관심은 신학적 인간학(theological anthropology)의 강조와 맞물려 인간 인격의 존엄성과 인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관심을 낳았다. 또한 1948년 첫 모임을 가진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출발부터 종교 자유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WCC가 1948년에 발표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공의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교회 역사 안에서 가톨릭교회는 종교 자유 문제에 있어서 부정적 태도를 보인 경험을 갖고 있다.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역사 속에서 교회가 복음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12항). 바로 이 공의회 문헌의 정신에 따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사순시기에, 복음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지난 시기 교회의 폭력적 행위들에 대한 참회예식을 거행했다.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은 교회가 복음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0년 3월 12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지난 2000년간 교회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있는 모습.

진리를 추구하는 자유, 신앙을 향한 자유

이 문헌에서 선포된 인간 존엄성과 하느님 계시에 근거한 종교 자유는 단순히 국가의 간섭과 강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종교 자유는 ‘진리를 탐구할 의무와 권리’(3항)를 갖는다. 즉 종교 자유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할 의무를 포함하는 자유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의무와 책임으로서의 자유를 양심을 통해서 깨닫는다. 이 문헌은 무엇보다 인간 양심의 역할을 강조한다.(3항) 양심의 역할은 신앙의 자유와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다. 또한 자유는 책임이 따르는 문제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8항) 따라서 참된 종교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준 당신의 모상을 따라 살며 양심을 계발해 야 하는 책임을 지닌 자유다.

이 문헌은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 자유가 신앙행위와 본질적으로 관련 있음을 강조한다. “신앙행위는 그 성질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10항) 따라서 교회의 복음선포 역시 타자의 종교적 확신들과 자유에 대한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선포방식이었음을 문헌은 강조한다.(11, 12항) 선교에 있어서 이 문헌이 갖는 중요한 함의는, 복음선포는 그 본질상 ‘강압’(coercion)이 아닌 ‘초대’(invitation)와 자유로운 ‘응답’(response)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완의 과제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문헌이 종교 자유 문제가 포함하는 어떤 문제들을 조금은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 안의 인권과 자유의 문제, 다원주의(pluralism)에 대한 신학적 평가의 문제, 교황 대사의 역할과 교황청과 국가 간의 협약 체제(concordat system)의 문제 등에 대한 논의는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문헌들 안에 나타난 종교 자유에 대한 법률적 근거(2~8항)와 신학적 근거(9~14항) 사이의 해석학적 긴장은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 공의회 이후 교황들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이 문헌에 대한 해석과 그 해석에서 수반되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전개에 있어서 드러나는 강조점의 차이는 여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또한 유럽연합 헌법 안에 유럽의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강조하려는 교회의 태도와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명하는 교회의 모습은 교회가 그리스도교세계(Christendom)에 대한 꿈과 그 역사적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올바른 이해와 그 올바른 이해에 기초한 참된 종교 자유의 문제는 아직 더 많은 탐구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정희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정희완 신부
정희완 신부는 안동교구 소속으로 199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정희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