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군선교 현장탐방] 이기자부대 봄 음악회 열리던 날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2-05-29 수정일 2012-05-29 발행일 2012-06-03 제 279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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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감동, 군생활에 큰 위로와 평화 선사했어요”
■ 프롤로그

“아…, 이건 좀…. 이건….”

비단테 보컬 챔버 앙상블(Vidante Vocal Chamber Ensemble) 임재현(42) 단장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공연을 채 세 시간도 남겨놓지 않은 시간, 이미 단련(?)이 된 단원들은 제쳐놓더라도 무대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다. 아니, 열악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단원들의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임 단장의 목소리가 수시로 높아진다.

“자…자, 오디오는 생각하지 말고 각자 소리를 최대한 살려서 다시 한 번 가봅시다.” “선생님들, 에코는 직접 넣는다는 생각으로 한 번만 더요.”

무대 세팅을 돕고 있는 병사들의 움직임에 자꾸 눈길이 간다. 단원들이 조금이라도 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으련만…. 세워놓은 마이크가 불안하다. 조명도 기대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 급기야 마이크가 쓰러진다. 임 단장도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는다.

비단테 앙상블 단원들의 리허설이 한창인 무대는 육군 27사단 이기자부대 79연대 강당. 장병들을 위한 정훈교육이나 특강 정도나 열렸을 법한 강당에서 음악회를 열려는 계획이 애초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부터 신자들도, 부대 장병들도 연신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무대 꾸미기에 나섰지만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다.

‘잘 될 거야. 주님이 불러주신 뜻이 있을 거야.’

모든 단원들이 한마음으로 자기 암시를 한다.

“지금보다 더 열악한 곳도 있었는데….” 그렇게 리허설은 이어졌다.

통로까지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비단테 앙상블의 공연이 열리고 있다.

■ 제1악장

비단테 챔버 앙상블의 공연이 열린 5월 18일, 이기자부대가 위치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은 전에 볼 수 없던 술렁임으로 하루를 맞았다. 주위에 변변한 문화시설은 고사하고 영화관 하나 없는 최전방지역에 역량 있는 성악가들이 찾아온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이날 음악회를 마련한 군종교구 이기자본당(주임 이정재 신부) 공동체는 오래 전부터 행사 준비에 힘을 모아왔다. 본당 신자들이 주축이 돼 행사에 필요한 소소한 준비물부터 행사장 정리는 물론 음악회 사회까지 직접 맡고 나섰다. 행사 진행을 위한 큐시트까지 미리 작성해 리허설까지 하길 몇 차례, 하지만 첫 데뷔라 가슴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음악회 사회를 맡은 본당 사목회 총무 김석중(안드레아·41) 소령은 떨리는 마음에 음주 진행(?)을 했다는 후문. 김 소령은 “군생활을 하다 보면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며 “먼 곳을 마다 않고 달려와 좋은 선물을 선사해준 분들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음악회가 시작되기 2시간여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군인들은 금세 400석 규모의 강당을 가득 메워버렸다. 군인인 아빠의 손을 잡고 음악회장을 찾은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기대에 들떠 언제 음악회가 시작되냐며 툴툴거리는 병사들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통로까지 채우고서야 음악회의 막이 올랐다.

병사들의 요청에 앙코르 무대를 펼치고 있는 비단테 앙상블 단원들.

■ 인터미션

이날 음악회에는 27사단 사단장 이진원(스테파노·55) 소장 등 군 관계자들은 물론 군종교구 유수일 주교를 비롯한 인근 군본당과 춘천교구 본당 사제들도 함께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군종교구 이기자본당이 지난 2010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마련해오고 있는 음악회는 군인들에 대한 사랑이 뭉쳐진 조그만 결정체다. 군문에 첫 걸음을 들여놓은 초급간부(하사·중사·소위·중위·대위)들이 군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접한 본당 주임 이정재 신부가 조그만 음악회라도 열어 이들을 위로해주자는 아이디어를 내며 빛을 보게 됐다. 이 신부가 알고 지내던 피아니스트 이선의(신니아·41·수원교구 용인 상하 성모세본당)씨에게 뜻을 밝히자 이 씨가 활동하고 있던 비단테 앙상블 단원들까지 그 뜻에 함께하고 나서면서 본당에서 열려던 조그만 음악회가 사단 차원의 행사로 커져버린 것이다. 첫 공연 이후 부대 내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 병영생활이 훨씬 활기가 넘치게 됐다는 소리는 비단테 앙상블 단원들에게도 적잖은 힘이 됐다.

소프라노로 활동하고 있는 박문주(세라피나·41·수원교구 용인 동백 성마리아본당)씨는 “가지고 있는 조그만 재능으로 봉사하러 다니지만 얻어오는 게 더 많다”면서 “노래로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에 활동을 거듭할수록 정체성이 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수일 주교는 이날 음악회에서 “음악은 내 영혼의 세정제이자 가장 가까운 벗”이라며 “음악에서 영혼의 기쁨을 얻어 충만한 군생활을 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 제2악장

“앵콜! 앵콜!” “한 곡 더. 한 곡 더!”

장병들의 목소리로 부대 강당이 떠나갈 듯하다. 연신 땀을 훔쳐내는 비단테 앙상블 단원들의 얼굴이 한껏 상기된 모습이다. 벌써 세 번째 앙코르 요청이다. 무대를 내려갔던 단원들이 다시 무대에 서자 박수가 쏟아진다.

“저희는 이럴 줄 모르고…. 미처 입을 맞추지 못했는데 문 리버(Moon River)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 단장이 즉석에서 앙코르 요청에 화답하자 다시 박수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운다. 1, 2부에 걸쳐 벌써 스무 곡 가까이를 소화해낸 단원들도 지친 기색 없이 혼신의 힘을 쏟아낸다.

음악회를 지켜본 27사단장 이진원 소장은 “큰 감동을 받을 때 엔도르핀보다 4000배나 효과가 있는 다이돌핀(Didorphin)이란 호르몬이 생겨난다”면서 “비단테 앙상블이 채워주신 오늘의 감동이 군생활에 큰 위로와 평화가 될 것”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빠 박승옥(베네딕토·41) 소령과 함께 음악회에 참석한 지원(12) 지민(9) 형제는 “아빠와 함께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며 “바쁜 데도 와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와 육군 27사단장 이진원 소장 등 군종교구 및 군 관계자들이 공연을 보며 환호를 보내고 있다.

■ 에필로그

지난 2006년부터 재능 나눔에 뜻을 둔 음악인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 2009년 9월 30일 정식으로 창단된 비단테 챔버 앙상블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현재 외래교수, 음악감독, 오페라 주역가수 등으로 활약하고 있는 전문 클래식 음악가들로 구성돼 있다. Vide와 Ante의 합성어로 ‘앞을 보라!’ 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비단테는 말 그대로 나눔이라는 한길만 보며 걸어왔다.

창단 초기 예닐곱 명으로 시작한 음악 봉사활동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15명에 이르고 있다. 천주교 신자를 비롯해 감리교 목사, 침례교 신자 등 단원들의 종파는 제각각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 이상의 끈끈함을 자랑한다. 이 때문에 창단 이후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성당과 동백 성마리아성당은 물론 개신교 교회 등에서 지역주민과 소외계층을 위한 음악회를 연 것을 비롯해 매달 한 차례 이상 소외된 곳을 찾아 하나된 목소리로 하느님을 전하고 있다. 지금껏 이들이 발길을 한 곳만 해도 각종 종교시설은 물론 장애인복지시설, 노인요양시설, 양육기관 등 일일이 꼽기 힘들 정도다.

이선의씨는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공연에 어려움이 적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곳일수록 눈물 날 정도로 감동을 전해줄 때가 있다”면서 “하느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활동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주를 마친 후 환한 웃음과 함께 공연장을 나서는 비단테 앙상블 단원들은 또 한 번 하느님 체험을 한 듯 기쁨에 찬 표정들이었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