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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43 - Ⅶ 현대 한국 가톨릭교회와 국가 5 1980년대 교회와 국가

최종철ㆍ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 연구원ㆍ사회학
입력일 2012-04-06 수정일 2012-04-06 발행일 1996-11-10 제 202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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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역할 감소, 신중화 경향 뚜렷
‘다양성속의 일치’ 미숙한 상태
교회 대형화ㆍ관료화ㆍ중산층화, 관리부담 증가
70년대 화두인 「인권」ㆍ「민주화」서 「통일」로 전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응방식을 놓고 분화되기 시작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입장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산하지 못하고 답습된 권위주의 군부 독재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복잡하게 분화되어갔다. 이러한 복잡성은 우선적으로 1980년대가 겪었던 정치변동에 의해서 불가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도 1987년6월 시민항쟁 이전의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를 나누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의 교회-국가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크게 우선 국가-교회-(시민)사회의 3자관계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할 것이며, 다음으로 교회내부에서는 고위 성직자층과 일반 성직자층, 평신도 집단, 그리고 해외종교조직, 즉 교황청 간의 관계를 주목하고자 한다.

◆ 격동의 시기

먼저 1987년 6월 시민항쟁이전의 시기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교회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보여줄 내부분열의 상징적 징표는 1979년 10ㆍ26 직전에 「가톨릭시보」에 발표된 「교회현실을 우려하는 연장 사제들」이 쓴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에서 나타난다. 이 호소문에서 연장 사제들은 비교적 젊은 사제들로 구성된 정의구현 사제단 등의 비판적 정치참여를 주교단에서 제지하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분규는 10ㆍ26, 12ㆍ12,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면으로 숨겨졌고, 1982년에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최기식 신부의 구속으로 교회는 70년대의 「호민관적」(체제비판적) 역할로 복귀하는 듯했다. 이러한 입장은 1987년 1월에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그해 6월의 시민항쟁에까지 견지되었다.

이 사건들 모두가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런 정치적 효과는 197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가톨릭으로의 개종의 물결을 지속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정치체제에 대한 폭발적 요구를 교회에 대행시키기에는 너무도 격동적인 시기였다. 「80년 광주」를 체험한 세대들은 70년대식의 「피신처로서의 교회」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독자적인 운동조직들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정치적 역할은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였다. 여기에 더하여 87년 6월 이후에는 형식적인 민주화의 진전과 국가에 의한 유연한 통치방식의 구사로 인해, 교회의 정치참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또한 정부의 교회에 대한 대응방식도 70년대의 강압적 자세로부터 유화적 자세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부는 천주교의 대규모 종교집회들, 즉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1981), 전래 200주년(1984), 세계성체대회(1989)와 북한선교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고위 성직자층과의 유대를 돈독히 하였고, 체제비판적 방향으로 주교단을 단결시킬 정치적 요인은 드물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도 교황청의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공세에서 나타나듯이 보수적 회귀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이런 정교관계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정상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전대통령은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가 국가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하고 있음을 치하』하면서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이 민주주의 실현의 기초가 되므로 대한민국 정부는 앞으로도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였고,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가 그 종교적 성격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각자의 별도 권능을 존중하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한 국민의 의지에 협조하고 기여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언론들은 이것을 『성직자의 정치불간여 방침을 분명히 한 것으로서 정교분리를 통해 세속을 정화하겠다는 교황의 평소신념이 표현된 것』이라고 논평함으로써 교회의 보수화를 부추겼다.

◆ 종교적 관심 내부화

한편 교회 내부적으로는 한국 천주교 공동체의 사회적 구성이 매우 이질화되었다. 즉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신자의 증가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교회의 정치적 보수화를 촉진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 1970년대 이후에 입교한 신자들의 사회계급적 위치를 통해서 확인되는 교회의 「중산층화」 현상 이다. 천주교 신자는 계급적 지위로 볼 때, 다른 모든 종교들에 비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근로계급과 도시하류계급의 구성은 전체 평균보다 낮으며, 농민계급의 경우는 현저히 낮다. 또한 소득이나 교육수준에서도 타종교에 비해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입교자의 사회적 특성은 도시 중산층 위주의 정치적 입장이 교회의 정치적 입장으로 표명될 개연성을 높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신자증가로 인한 교회조직의 대형화와 관료화, 조직관리 부담의 증가로 인한 「종교적 관심의 내부화」 경향을 들 수 있다.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교회와 사회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내부의 사정이 이렇게 변화해가는 가운데, 87년 12월에는 사제단에서는 12ㆍ16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것은 또 다시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사제가 공식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타당한가, 부당한가, 그리고 사제의 정치참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의 지배적 여론은 『이전의 정의구현 사제단이 받았던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이 경우에서는 깎아내렸다』는 것이었다. 사제단의 활동은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해 단지 도덕적 지도력만을 행사하는 종교단체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여느 세속적인 정치단체의 활동과 더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의 통일운동을 들 수 있는데, 교회의 체제비판적 정치참여가 교회-국가간의 갈등보다 더 큰 파장으로 교회내부의 갈등을 야기한 사례였다. 통일운동이 투쟁의 목표로 등장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70년대의 인권과 민주화의 화두는 80년대에 와서는 통일로 변화되는데, 그것은 인권과 민주화의 제약은 분단체제로부터 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분단체제의 극복, 즉 통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운동권의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통일운동은 소위 「문규현 신부사건」을 통해 문제화되었다.

당시 20세의 여대생으로 천주교신자였던 임수경이 급진적 학생운동단체인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의 대표로 1989년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북한에서 비무장지대를 거쳐 남한으로 내려올 때, 사제단이 파견한 문규현 신부가 동행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건이었다.

문신부를 북한에 다시 파견함으로써 사제단이 의도했던 것은, 남국현 신부(당시 사제단상임위원 대표)의 말에 따르면: 첫째, 사제로서 가톨릭 신자인 임수경양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목적인 배려, 둘째, 민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 보안법의 폐지, 셋째, 통일논의 확산의 계기마련, 넷째, 공안정국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였다. 이런 취지하에 추진된 문신부의 방북은 특히 그의 판문점에서의 반미적 구호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앞뒤의 맥락을 단절한 채 교묘하게 편집한 대중매체의 보도에 의해 혹독한 여론재판을 받아야 했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내에서 보수적 입장의 입지를 확장시키고 진보적 입장의 그것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주교회의는 사제단의 행동을 『국민을 우려와 불안으로 몰아넣은 부당한 행동』이었다고 선언했다.

◆ 교회내 불일치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지도자들도 주교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심지어 사제단내에서도 문신부 파북 최종결정을 내리기전에 교회의 통일사목에 사용할 합당한 방법을 두고 사제들 사이에 불일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첨예화된 교회내의 보혁간의 갈등은 교회의 내적 개혁, 교회 내 민주화 문제로 비화되어갔다. 교회내부의 갈등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난 계기는 주한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가 중앙일보와의 회견에서 문신부가 주교의 승인없이 정치활동에 개입했다고 비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덧붙여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치원 수준인데, 국민들은 마치 대학생처럼 행동하며 한국의 「민주주의」(democracy)는 「demo-crazy」같이 보인다』고 함으로써 교회내 진보적 인사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 창조적 긴장관계

바람직한 교회와 정치권력간의 관계는,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N.Bellah)에 따르면, 정교분리(disjunction)도 아니고 정교합일(사회적 용해상태:fusion)도 아니며, 교회와 정치권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관계」(creative tension)라고 지적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80년대는 이러한 창조적 긴장관계의 올바른 설정을 위한 모색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에서 70년대보다는 교회의 정치적 역할이 감소하였고 교회 역시 정치적 참여에 신중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의 종교조직에 대한 통제가 유연해지고 「게임의 감각」을 습득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80년대의 교회-국가관계는 양자사이에서만큼 교회내부의 분파들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어내기에는 아직은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의견을 달리하는 믿음의 형제들과 의견을 조정하는 훈련, 즉 진정한 민주화의 훈련은 교회내부에서도 절실히 요청되는 상태에 있다 하겠다.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민주화의 멀고 험난한 길을 다 간 것으로 착각하며 70~80년대 투쟁의 기억을 상실해버린 세태를 바라보면서, 또한 「문민정부」의 개혁이 드러내는 헛점들을 확인하면서, 가톨릭교회가 「정치문제는 정치인에게로!」를 외치며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의 오색영롱한 빛깔속에 안주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너무 불안정하고 너무 불투명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종철ㆍ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 연구원ㆍ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