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 교회사 연구소【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입력일 2012-04-02 수정일 2012-04-02 발행일 1996-10-06 제 202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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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애와 영성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백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은 김대건 성인의 삶과 영성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학술 심포지엄이었다.

특히 이번 학술 심포지엄은 김대건 성인의 내면적 영성을 심도 깊게 조망해 성인의 순교는 당시 조선 사회의 충효 존중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우러져 드러난 창조적인 행위였다는 결론을 도출, 「김대건 성인의 영성의 토착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학문적 평가를 받았다.

다음은 본보가 후원한 이번 학술 심포지엄의 주제별 강연 요약문이다.

◆ 조광 - 순교의 교회사적 배경

하느님의 충신ㆍ효자로서 순교

김대건의 신앙과 삶이 드러내고 있던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에 관한 이해가 요청된다. 그는 19세기 전반기 제2차 단계의 서세동점(西勢同漸)이 시작되던 시기에 조선에서 태어나 활동했다.

그는「선교의 세기」로도 불리던 19세기의 사회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로 부터 교육을 받았고, 이 교육의 과정에서 당시 유럽교회의 관행과 신학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19세기 전반기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감과 동시에 당시 교회가 드러내고 있던 특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대군대부론」(大君大父論)이나「임자」에 대한 관념, 가족주의적 특성들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김대건 당시의 사회와 교회가 그의 삶과 신앙에 미친 영향의 일부를 알 수 있게 된다.

천주교 신앙이 수용된 지 두 세대가 경과해 가는 과정에서 조선의 신도들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재해석과 자기 문화화를 시도해 갔다. 이 예를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중요한 관념인 신관(神觀)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천주를「대군대부」(大君大父)로 받들어 모셨다.

김대건 신부 역시 하느님의 충신과 효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을 조선의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으로부터 받았다. 천주는 그에 있어서 새로운「임자」였고, 이 세상의 격량을 헤치고 신자들을 이끌어 주는「장군」이었다.

요컨대 김대건이 활동하던 당시 조선 교회는 민중 종교 운동으로서의 경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김대건은 바로 이러한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전교해야 했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교회의 지도자가 됐고, 비특권적인 민중들의 교회를 이끌어 가야 했다. 또한 그는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경향을 이어받고 있었다.

이렇듯이 김대건 신부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 교회의 일반적 경향과 신앙적 특성에 영향을 받았다.

<교수ㆍ고려대 한국사학과>

◆ 최석우 신부 - 연구와 현양 의의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순교영광 차지한 영성 중요

김대건 신부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와「현양」의 역사는 그런대로 발전을 해 왔다. 다만 연구와 현양이 병행되었더라면 두 분야가 좀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연구」와「현양」은 상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할 때 모두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필자는 김대건 신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교회사 서술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새삼 느끼게 됐다. 하나는 김대건 신부의 역사 서술에 있어서 지금까지 세계 교회사적인 배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두드러진 예가 1837년 마카오의 밀난으로 대표부 신부들이 김대건, 최양업 학생과 함께 마닐라로 피난하였다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때 문제가 된 것은 민란이 아니고 포르투갈의 보호권이다. 이 보호권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를 적대시하게 됐고 마침내 마카오 대표부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축출로 위협하게 됐다. 그러나 축출까지 악화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중국의 교회사적 배경을 고려하였다면「민란으로 인해 마닐라로 피난」이라는 오판은 충분히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건의로 만주와 몽고를 포함한 요동교구가 보호권 교구인 북경교구에서 분할 독립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됨으로써 김대건을 위시한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을 위한 만주길이 열리게 됐다는 역사적 배경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김 신부의 입국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지금까지의 김대건 신부의 역사 역시 영웅주의적인 역사 서술 방법으로 기울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사실인즉 김대건이 동창인 최방제와 최양업에 비해 능력과 판단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번 마카오 자료에서 드러났다. 인간이란 완전할 수 없다면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여 인간적으로 완성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서도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을 인간적으로 완성하고 나아가서 순교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한 그의 영성이 더 중요하다. 그만큼 그의 영성이 더욱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사 연구소 소장>

◆ 이원순 - 집안 신앙내력과 순교 전통

가문에서 4대 걸쳐 10명 순교

한국 교회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는 한국 교회의 본방인(本邦人) 성직자 시대의 개막을 이끈 한국의 수선 탁덕이었다.

그가 한국교회에 남기신 위덕(衛德)과 공헌(貢獻)은 그 자신의 신앙은 물론 그 가정이 일찍부터 천주 신앙을 받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희생자를 내고 가족이 이산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지켜온 성가정으로의 신앙이 있음으로써 얻어진 고귀한 봉헌의 의화(義化)였다.

충청도 내포 지방 향반 가문 출신이었던 김대건 신부의 천주 신앙 수용은 증조부 당시 동향 관계로 친분이 있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영향으로 된 것이나 가내 모든 식구가 천주 신앙을 열성껏 받들게 됨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부 택현에게 시집온 이존창의 딸인 멜라니아의 헌신적 내조와 신앙에 힘입어 된 것이다.

면천(沔川)고을의 향반이던 김 신부의 증조부 운조 일가의 천주교 봉행 사실은 얼마가지 않아 당국에 알려졌고 운조는 체포돼 옥사 순교했다.

증조부의 순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산협 골짜기로 숨어들게 된 택현 할아버지의 결단과 다시 거처를 옮겨 교우촌 지도자로 신자들을 이끌었던 부친 제민, 그리고 어린 대건 소년에게 자상하게 신앙을 인도한 모친 고 우술라의 믿음 등 그의 가문이 이런 천주 신앙의 성가정의 분위기였기에 김대건은 성소를 받아들여 천주의 부름에 나설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 순교에 앞서 이미 그 가문에서는 증조부 운조, 작은 할아버지 택현, 그리고 한현의 딸인 당고모 김 데레사와 그의 장부 손연욱의 순교가 있었다. 그들의 피의 봉헌이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의 성직 생활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게 한 활동의 힘이 됐을 것이다.

한편 김대건 신부 순교 후에도 그의 가문의 천주 신앙은 지방 여러 곳으로 이산되어 생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열도를 더했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또 다른 다섯 명의 순교자가 그 가문에서 나온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4대에 걸쳐 10명이 순교했다.

앞으로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치밀한 고증의 학문 활동을 통해 몇 분의 순교 사실이 더 밝혀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차기진 - 활동과 업적

생애와 활동은 언제나 고난으로 가득

마카오를 떠난 이후 순교하기까지 김대건의 생애와 활동은 언제나 고난으로 가득했다. 이 4년6개월여의 기간은 순명과 신앙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 기간은 다시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마카오를 떠나 요동에 도착한 뒤 단독으로 조선 입국을 시도해 했다가 실패하고,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이 있던 소팔가자로 되돌아가는 1843년 4월까지 1년2개월 동안이다.

두 번째 활동은 소팔가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훈춘을 여행하고 부제품을 받은 1844년 12월까지 1년 8개월 동안에 이루어졌다.

세 번째 활동은 김대건 부제가 1845년 1월 1일 봉황성 책문에서 밀사들을 만난 뒤 의주를 통해 입국한 다음 서울에 도착, 활동하다 다시 조선을 출발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8월 24일 횡당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릴 때까지의 7개월 동안이다.

네 번째 활동은 김대건 신부의 생애에서 마지막 기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품을 받은 뒤 조선에 입국, 황해도로 가서 중국 배에 서한과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체포되어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게 될 때까지 이다.

김대건 신부가 남긴 서한은 모두 21통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저술로는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시험 답안지인「라틴어 작문」2건과 서한이자 보고서라 할 수 있는「훈춘 여행기」「조선전도」,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들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이후 이듬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사목활동을 했다. 처음 그의 사목은 돌우물 골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김대건 신부는 서대문구 미나리골의 김 회장집과 남대문로 쪽우물골 등지를 방문하고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용인으로 내려가 고향 골배마실에서 모친과 상봉했다.

이후 김대건은 용인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 1846년 부활 대축일 미사를 은이공소에서 드린 다음 서울로 올라가 서해로 나간 후 체포됐다.

그의 성무 집행은 옥중으로까지 이어져 1846년 7월에 예비교우였던 임군집(요셉)과 김업이(막달레나)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 조규식 신부 - 김 신부의 영성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 이루는 삶 살아

김대건 신부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많은 활동과 업무 가운데서도 늘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특별한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과 늘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보살펴 주신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영성 생활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적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는 교회의 장상들에게는 참으로 깊은 존경과 순명의 정신으로 대했으며, 신자들에게는「사랑하는」「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등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줬다.

김 신부의 기록에서 당시 조선의 선교에 대한 큰 열망과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귀국 전부터 조선을 항상 포교의 연관성 안에서 생각했으며 그의 스승 신부들에게도 그러한 내용의 기도를 부탁했다.

또한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에도 꿋꿋하고 용기있게 천주교를 증언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들은 당시 박해 속의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증거가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매우 가치있는 교훈이 되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의 순교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박해와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본받고자 노력했으며, 옥중에서 쓴 서한들 속에서 더욱 깊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는 귀국 전부터 순교자들이 하느님 앞에 무한히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믿었으며, 그 역시 그러한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김 신부의 순교는 갑작스러운 어떤 사건이 아니라, 많은 기도와 준비를 통해 이루어진 영적 삶의 결실이다.

<대전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