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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40 - Ⅶ 현대 한국 가톨릭 교회와 국가 2 이승만 정권과 교회

노길명ㆍ고려대 종교사회학 교수
입력일 2012-03-27 수정일 2012-03-27 발행일 1996-09-01 제 201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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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 예언직 수행… 선교 한몫
상호 이해합일에서 출발… 갈등 가능성 내포
‘사회 참여’ 소박한 열정에 토대 한계 “뚜렷”
머리말

정치사로나 교회사로 볼 때, 이승만(李承晩)정권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일제(日帝)의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해야 할 시기였으며, 교회적으로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체제를 벗어나 민족교회로 거듭나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하였던 이승만에게는 취약한 국내 기반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과제를, 그리고 한국교회에게는 그동안 민족사에 적극 동참하지 못했던 역사적 부채를 청산하고 신생독립국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과제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교회 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는 바로 이와 같은 양자의 과제와 이해관계였다. 상해 임정(臨政)계열이나 국내 세력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이승만으로서는 교회의 적극적인 지지가 정치적 기반 강화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고,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도모코자 하는 교회로서는 이승만 정권의 폭 넓은 지원이야말로 사회적 영향력을 넓히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정권과 교회의 유착

이정권과 교회 간의 관계는 이승만과 방인 (邦人) 최초의 주교이며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盧基南)주교 간의 관계로 집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는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과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였던 장면(張勉)박사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교회 간의 관계는 대단히 우호적인 관계로 시작되었다. 그 관계는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는 교회의 행사가 발단이 되었지만, 양자 간의 관계가 밀착되기 시작한 것은 「경향신문」의 논조 때문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신탁통치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는 반탁(反託)을,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을 때에는 그 결의를, 좌익의 방해로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총선거를, 그리고 종국에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이승만의 정치적 노선을 지원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경향신문」의 지지는 김구(金九)나 김규식(金奎植) 등 남북협상세력과 경쟁관계에 있던 이승만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신문」의 보도 태도로 인해 이승만과 노 주교의 관계는 급속히 밀착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노 주교에게 「경향신문」의 논조에 감사를 표시했으며, 자신은 개신교 신자이지만 가톨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 주교에게 정치적인 자문을 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밀월관계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가톨릭이나 가톨릭 신자들과 관련된 사항에 관해서는 거의 대부분 노 주교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노 주교는 이러한 기회를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당시, 노 주교는 교회가 독립국가 건설에 동참하고 민족의 복음화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많은 평신도들을 사회의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진출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식과 판단은 장면 박사의 정계진출로 이어졌다. 노 주교는 평신도 지도자이며 자신의 신학교 스승이기도 하였던 그에게 정계진출을 권유하여 총선거에 출마토록 하였다. 또한 그가 출마한 다음에는 그의 선거운동을 직접 진두지휘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승인 받기 위해 유엔총회에 대표로 선임될 때에나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될 때에는 이승만에게 그를 적극 추천하였으며, 부산 피난시절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를 국무총리로 임명코자 하였을 때에는 장면 박사에게 그것을 수락하도록 설득함으로써 이정권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밀월에서 갈등관계로

이정권과 교회 간의 밀월관계는 1952년 5월 정치파동을 계기로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양민 5백여 명을 공산 게릴라라는 혐의로 학살한 거창사건과 1백만 명의 제2국민병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간부들은 23억 원과 양곡 5만석 이상을 착복한 국민방위군사건 등으로 인해 재집권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선거방법을 간선제로부터 직선제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헌법 개정을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의원 50여 명을 헌병대로 연행하는 등 불법적인 행동을 자행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상정한 후 경찰의 삼엄한 포위 속에 기립표결로 통과시킴으로써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그는 소위 「사사오입 헌법개정」과 장면 부통령에 대한 피격사건, 자신의 정적(政敵)이었던 조봉암(曺奉岩)에 대한 처형, 신 국가보안법의 제정 등 자신의 종신집권을 향한 독재정치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승만의 실정(失政)과 종신집권 음모 그리고 독재정치가 표면화됨에 따라 「경향신문」의 논조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발행 초기부터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던 「경향신문」은 발췌개헌안이 상정되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으며, 그로 인해 1952년 5월에는 정치적 테러집단이었던 「땃벌레」의 습격을 받아 부산 임시본사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야당성과 반독재노선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한편, 1951년 노 주교의 권유로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던 장면 박사도 이듬해 사임함으로써 이승만의 정치노선과 결별하였다. 그 후 그는 야당 지도자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에는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1956년과 1960년에는 야당후보로 출마하여 극한적인 야당탄압과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부통령에 당선되는 등 반독재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하였다.

「정치주교」「야당주교」

「경향신문」과 장면의 반독재투쟁은 이승만과 교회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애당초, 양자 간의 관계는 서로 이해의 합일에서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양자 간의 이해가 상충될 경우에는 언제라도 갈등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노 주교를 불러 「경향신문」의 보도태도에 항의하였으며, 정부의 고위층들은 노 주교를 「정치주교」또는 「야당주교」라고 비난하였다. 발췌개헌안이 상정되었을 때부터 「경향신문」의 보도태도를 질책하였던 이승만은 1957년 10월부터는 교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박해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에 시행된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가톨릭신자 후보들을 낙선시키라는 비밀지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교회에 대한 정치적인 박해가 노골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법무부 장관을 교황청에 파견하여 「정치주교」인 노 주교를 다른 주교로 교체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노 주교에게 경고와 질책을 보내면서 「경향신문」의 운영을 타인에게 넘길 것을 종용하는 한편, 노 주교가 정치에 개입하는가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선교지역의 사무를 관장하는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을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포교성성 장관은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의 동창으로 차기 교황으로 물망에 오르던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었다. 그는 한국정부의 관계자들을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정작 노 주교와 만나서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비판활동을 중지할 것과 신문운영에서 손을 뗄 것을 짧게 종용할 뿐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에 관해서는 별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의 방한 이후에도 이정권에 대한 「경향신문」의 비판적인 논조는 계속되었다. 특히, 장면 부통령에 대한 저격사건은 교회의 반발과 함께, 이 신문의 야당성과 반독재노선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경향신문」의 노선은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당시로서는 경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20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이정권은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시키는 것으로 언론과 교회에 대응하였다.

사회참여와 교세증가

이승만이 집권하던 제1공화국은 한국교회의 교세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에 15만 7천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의 수효는 이정권 말기인 1959년 말에는 264.53%나 증가된 41만 7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것은 놀랄만한 신장율이었다. 이에 대해, 그동안 교회 내에서는 당시 교회를 통해 들어오던 구호물자가 그 원인이라는 해석이 지배해 왔다. 또한 이러한 해석에 따라 당시에 입교한 신자들을「구호물자 신자」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 첫째는 당시에 입교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구호물자가 필요한 하류계층이었어야 한다. 물론, 이 기간에 입교한 신자들 가운데 하류계층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나 사회의 지도자층 인사들도 대단히 많았다. 예를 들면, 유명한 목사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개신교의 지도자들, 법조인들, 문인과학자들, 정치인들의 개종과 입교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도 이 시기였다. 1세기 간에 걸친 박해를 통해 민중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어오던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계층상의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한 전환기가 바로 이때였다는 사실은 교세증가의 원인이 단순히 구호물자 때문이라는 논리의 설득력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둘째로 교세증가가 구호물자 때문이라는 주장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구호물자가 가장 많이 들어오던 1955년 이전의 신자 증가율이 그것이 줄어들었던 그 이후의 시기보다 높았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 증가율은 오히려 1956년 이후에 더 높았다. 특히 이승만의 독재체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교회의 비판적 입장이 강화되었던 1957년부터 1959년까지의 증가율은 매년 17%를 훨씬 웃돌고 있었으며,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교회의 예언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던 1960년 이후 몇 년 동안은 오히려 그 비율이 10%미만으로 감소되었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한다면, 결국 이 시기에 있어서의 놀랄만한 교세증가는 구호물자보다는 교회가 나타냈던 예언적 활동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반독재투쟁을 하였던 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5ㆍ16쿠데타 이후 대거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의 증언에서도 표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의 입교가 일차적으로는 장면 박사의 인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이승만 독재체제에서 나타낸 한국교회의 활동도 가톨릭에 대한 친화성을 높이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보여준 독재정권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활동은 한국교회가 본격적으로 민족사에 투신하고 민중과 함께 한 예언활동으로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맺음말

한국교회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교회가 직접적으로 반독재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이정권에 대한 비판과 항쟁은 교회가 운영하는 「경향신문」이라는 언론기관과 장면 박사를 비롯한 일부 평신도들의 활동으로 표출되었으며, 교회는 단지 이들의 비판과 항쟁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지원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부나 교황청의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정권과 「경향신문」간의 관계나 또는 이정권과 장면박사 간의 관계는 곧 이정권과 교회 간의 관계로 비춰졌으며, 교회 또한 그러한 갈등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정치권력으로부터 가해지는 여러 형태의 압력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경향신문」이나 장면 박사의 반독재투쟁은 교회활동의 일부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활동은 교회와 국가 간의 바람직한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신학적인 바탕이 없이, 단지 사회참여에 대한 소박한 열정에 토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계성을 갖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의 방한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세계교회의 차원에서도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관한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세계교회 차원에서의 사회교리가 제시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한국교회에 대해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사회교리를 요구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무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이정권에 대한 교회의 비판적 입장의 이면에는 장면 박사라는 개인에 대한 애정과 지지가 상당히 작용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성은 그가 집권한 후 그의 정치적 역량이 문제가 되더라도 그에 대한 비판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회의 입장과 활동이 사회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한편 교회 내적으로는 교세의 성장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는 점에서 이정권과 교회 간의 관계가 주는 역사적 교훈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적극적인 예언활동과 사회참여가 교세확장과 복음전파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그 후 군사정권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입증되었다.

노길명ㆍ고려대 종교사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