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명말청초] 중국에서의 서양선교사 활동 3

서양자 수녀ㆍ한국 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3-26 수정일 2012-03-26 발행일 1996-08-25 제 2017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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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고바르디 신부 등 대포 주조
아담 샬 신부 환관에게 주조 기술 전수
명 천계제(天啓帝)때 외환이 심하여 정부의 명을 받고 롱고바르디 신부와 디아스 신부, 삼비아시 신부, 로드리구에스 신부 등이 대포 주조를 하고 군인들에게 대포 다루는 법과 대포 발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인조 9년(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명에 가서 천리경(千里鏡), 자명종 등 현대적 기계와 로드리구에스 신부로 부터 천문서(天文書), 직방외기(職方外記)와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을 가져와 화포 제조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서광계가 롱고바르디 신부와 삼비아시 신부 두 신부를 마카오에 보내어 대포를 구입하게 하였다. 롱고바르디 신부가 포르투갈인들이 자금을 조달하여 대포 10문과 군인 4백여 명을 모집하여 전쟁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서광계에게 보냈다. 대포는 광주(廣州)까지 오고 군인들은 남창(南昌)에 도착하였는데 조정에서 갑자기 북진하는 것을 허락지 않아 마카오로 돌아갔다.

서광계는 장년시절 마카오에 두 번씩이나 가서 서양대포와 무기를 보고 온 일이 있으며 서양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서광계는 계속 대포 구입과 대포 주조를 해야 된다고 황제에게 상주하는 한편 이지조에게 서신을 보내어 대포 구입할 돈을 모금하게 하였으며 이지도와 양정균은 모금을 하여 장도(張燾)를 마카오에 보내어 대포를 구입하게 하였다. 이때도 조정의 대신들은 대포 구입을 반대하였다.

산해관(山海關)은 북경의 최후 보루로서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산해관 못 미쳐 영원성(寧遠城)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구입한 대포 11문이 영원성의 요처 이곳저곳에 배치되었다. 누루하치의 군대는 영원성에 포르투갈 대포가 배치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단숨에 밀어부칠 작정으로 마구 공격했다가 가공할 불덩어리가 벼락 치듯 굉음을 내면서 마구 쏟아져 함락치 못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누루하치가 이때 대포에 부상을 입고 그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후금(後金, 청)이 대포를 주조한 것은 1631년 6월부터이다. 후금은 1636년 구호를 청(淸)으로 고쳤으며 청이 병자호란 때 이미 서양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사용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대포를 주조하고 발사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포르투갈인 23명이 북경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부의 노조용(盧兆龍)의 말을 가볍게 믿고 포르투갈인을 마카오로 돌려보냈다. 산동성 등주(登州)에서 손원화(孫元化)가 대포를 주조하였으며 그때 포르투갈인 53명이 대포 주조를 도왔다. 이때 등주의 장군이 후금에 투항하여 등주가 후금에 함락되면서 20문이 넘는 대형 대포와 3백여 문이 넘는 중형 대포가 후금군의 손에 들어갔다. 명 숭정 3년(1630년) 2월에서 8월까지 4백여 문의 대포가 주조되었으며 명은 지방에서까지 대포를 사용하였다.

대포 주조 과정에서 기술자들이 기밀을 누설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며 명은 청과의 전쟁에서 망원경을 사용하였다. 중국의 대포 주조기술자 이지조, 손원화, 장도가 이미 늙고 병들었으므로 1630년 아담 샬 신부는 환관들에게 대포 주조하는 기술을 가르쳤으며 20문의 대포를 주조하고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북경교외에서 시험 발사하였는데 성능이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계속해서 각 형의 대포 5백문을 주조하였다. 샬 신부는 주조에 대하여 이렇게 술회하였다.

『만일 대포 주조를 거절했다면 황제는 틀림없이 네덜란드 군사 전문가에게 대포 주조를 요청하였을 것이다. 사실 네덜란드가 대포주조를 하겠다고 건의한 바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중국 천주교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에 개신교가 성하여 자국 안에서도 성모상을 파괴하고 식민지 지역에 천주교를 궤멸시키려 하였으므로 선교사들은 네덜란드의 중국 진출을 상당히 꺼려하였다.

강희제 때 오삼계(吳三桂)의 반란을 삼번(三蕃)의 난이라 하는데 1673년 운남성 귀주성을 삽시간에 수중에 넣고 호남에 진출하여 요지를 점령하였으며 이난은 청조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큰 난이었다. 강희제는 페르비스트 신부에게 대포 주조를 명하였으며 페르비스트 신부는 남쪽 지형에 맞고 운반하기 좋게 대포를 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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