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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가톨릭 문학산책] 19 멕시코 바로크 문학의 최고봉 - 소르 후아나 수녀

우덕룡ㆍ외대 서반어학과 교수
입력일 2012-03-26 수정일 2012-03-26 발행일 1996-08-18 제 201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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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식만큼 자유로운 것은 없다”, 멕시코 문학에 있어 가장 영광스런 여인으로 평가
“자유롭기 위해 배운다”학구열 탁월
개성 넘치는 철학ㆍ교훈 시 돋보여
페스트 환자 간병하다 감염돼 선종
Ⅰ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에 걸친 시기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중세기의 신 중심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르네상스의 시기, 즉 인본주의 부활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도그마를 강요했던 중세기의 경직된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배경으로 해서 좀 더 자유로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고자 하는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르네상스 즉 재생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과거를 현재의 의미로 부활시키는 것이었음에는 두말할 나위 없다. 물론 이러한 인간 중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에 근대 과학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천동설로부터 지동설로의 이행은 인간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듯 인간은 이제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하게 되었는데 이탈리아부터 시작한 인본주의 운동은 유럽 전역을 휩쓸며 근대 문명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그리이스 작품의 재생으로 또한 모방으로 균형 잡힌 조화에 중점을 두게 되는데 이는 곧 이에 반발하는 또 하나의 힘인 원심적인 힘에 도전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인류 예술 양식 중의 하나인 바로크 시대를 열게 된다. 이 바로크는 유럽에서도 자체 모순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던 스페인-종교 개혁이라는 지배적인 세태에 저항하는 스페인의 반개혁에서 가장 꽃피우게 되는데 이는 바로크가 모순과 긴장의 축에 있기 때문이리라.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로뻬 데 대 베가, 깔데론 데 라 마르까, 공고라, 께베도 등 스페인 문학의 가장 위대한 황금 세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곧 이 거대한 물줄기는 대서양을 건너 그 때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의 하나였던 멕시코에 미치게 된다. 「신 스페인」으로 명명되었던 멕시코는 16세기의 정복의 소용돌이를 지나 17세기에는 잦은 정복전쟁으로 인해 정치 경제적 파탄에 빠진 모국 스페인과 달리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신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구대륙 특히 스페인으로부터 이식된 종교, 즉 가톨릭은 아메리카 대륙에 수많은 토착 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종교적 생활과 16세기 초에 멕시코의 떼뻬약(Tepeyac)에서 토착 인디언 모습으로 발현한 과달루페 성모 기적과 더불어 선교사의 노력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7세기는 신대륙의 땅에 이식된 구대륙의 삶은 또 다른 새로운 문명의 건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기였다.

Ⅱ 이렇게 정치,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던 멕시코의 땅에 여자의 몸으로, 수녀의 몸으로 바로크 문학의 최고봉에 오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델 라 꾸르스이다. 제10의 뮤즈라 불리는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델라 꾸르스는 멕시코 문학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런 여인이다. 지적 세계에서 여성의 수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시절에 태어났지만 그녀의 지식과 필명은 그 때 당시의 모든 이를 압도하고 말았다. 그녀의 본명은 후아나 데 아스바헤 이 라미레스 데산띠야나이고 화산들로 둘러싸인 「산 미겔 네빤뚤라」라는 마을에서 1651년 11월 12일에 태어났다. 이미 3살 때 읽고 쓰기를 배웠으며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곤 했었다.

6, 7세에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어머니에게 남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홀로 고집스럽게 만족시킬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답고 영특하고 또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녀는 당시 총독의 아내인 레오노르 까레또 후작 부인의 궁정에 삼촌 소개로 출입을 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총독의 배려와 궁정의 서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 얽힌 일화 중 그녀는 시간을 정해 놓고서는 공부를 했는데 그 정해진 시간 내에 다 배우지 못하면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즉『텅 빈 머리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은 단지 탐욕스러운 치장에 불과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총독이 40명으로 구성된 대학 교수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그녀를 테스트하도록 했을 때에도 그녀는 궁정을 경악시켰을 뿐이었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공부를 했던 그녀에게 정신적 위기가 찾아오는데 이는 그녀가 진리의 길을 찾도록 했으며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도록 한다.

『종교에 귀의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에 대해 안다 할지라도 더욱이 본질이 아니고 표면적인 것을 다룰 때면, 내 자신의 천재성에 더욱 더 혐오감이 생겨나며 또한 결혼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추구하는 안정을 위해, 덜 불균형적이고 가장 단정한 길은…』

처음엔 가르멜 수녀원에 그리고 몇 달 후에 성 예로니모 수도원에, 그리고 그곳에서 수녀가 된다. 수녀의 삶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평안하지 못했다. 종교적 행사와 수녀들과 공동생활로 인해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나 그녀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제 후아나 수녀의 목적은 신학에 대한 열망이었다. 『선생 없이 책만을 읽고 또 읽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자신의 방을 수많은 책, 악기 그리고 과학도구로 가득 채웠다. 과학적 지식은 그 당시의 저명한 수학자인 돈 까를로스 데 시구엔사 이 공고라와 교분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1687년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의 안또니오 비에이라의 글을 논박하는 「설교란 위험」이라는 글을 쓰는데 푸에블라의 주교인 마누엘 페르난데스 데 산따 꾸르스는 후아나 수녀에게 더 이상 세속적 공부와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와 더불어 이 글을 「아테네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이 경고는 후아나 수녀의 내부 갈등을 증대시켜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집필을 하지 않고 침묵과 고통으로 일관하다가 17세기 말엽, 페스트가 멕시코 시티에 창궐할 때 환자를 간호다가 감염되어 1965년 4월17일 눈을 감는다. 어느 누구도 그 당시 그녀의 영혼만큼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생애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인간의 지식만큼 자유로운 것은 없다』. 그녀는 바로 이러한 이상을 위해 투쟁한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 배운다고.

Ⅲ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델 라꾸르스는 많은 시, 산문, 극을 남겼는데 특히 시에서 그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이 십분 발휘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시가 있으나 그녀의 모든 시는 철학적이고 교훈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인간의 삶과 덧없음, 그리고 지식과 허영의 무의미함 등에 대한 철학자 명상이다. 한 로만세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짐짓 행복한 척 할지라도

순간의 슬픈 생각일 뿐

날 설득하여 주소서

비록 슬픈 생각이라 할지라도

다음 시는 그 때 당시 남성 위주의 시대에 대한 풍자로서 인구에 회자하는 시인데 여기서 당시 사회에 대한 그녀의 저항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맹목적으로 여자를 추궁하는

고집스러운 남성들이여

추궁하는 잘못이 그들 자신들의

행태임은 보지 못하는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경멸한다면

왜 그렇게 못살게 부축이면서

여성들이 잘하기를 원하는가

아집과 싸우고서

진정으로

자신들의 고집이 경박스러웠다고 말하시오

애들을 함부로 다루는 당신네들

미치광이 같은

무모함을 시도하는 것 같소

하여 애들이 당신들을 무서워하지 않는가

그녀의 장시「첫 번째 꿈」은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는 스페인의 공고라의 장시 「고독」의 형식을 모방하였다. 소르 후아나의 시에서도 공고라의 과식주의의 요소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테마 역시 매우 복잡하다. 한밤중에 꿈속에서 영혼은 날개를 펴서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보는데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이제 환멸을 느끼는 동안에 날이 새서 깨어난다는 기법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신에 대한 도전의 무모함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파행적 행위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르 후아나는 부당한 권위와 질서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그리고 인성과 신성을 연구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했다. 그녀의 이런 주장과 활동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진기하게만 보였지만 수녀의 신분으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했던 그녀의 마력적인 매력은 오늘날 우리들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삶의 행태를 재고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덕룡ㆍ외대 서반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