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37 - Ⅵ 한국 가톨릭교회 사회개발 및 복지사업 6 아동복지

조화영ㆍ대학강사ㆍ사회복지사 전공
입력일 2012-03-23 수정일 2012-03-23 발행일 1996-07-28 제 201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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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회학교」로서 다양한 서비스 요청
1854년 메스트르 신부 설립 영해회가 “원조”
해방 전까지 ‘위탁양육’서 ‘시설보호’로 전환
80년대 들어 소공동체 보호사업 위주로 활성화
머리말

복지제도란 그 시대에 직면한 사회적 위험(Social Risk)에 대응해 나가기 위한 자구책으로써 관(官) 또는 민(民)에 의해 행해지는 일종의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각 시대별로 유형을 달리하여 가해지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여 정부에서 미처 배려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에 대한 사회복지 사업을 시행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사회복지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아동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그 시대의 사회적 위험에 따라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는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이는 정부의 아동복지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아동복지에 대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대체적으로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대 구분의 기준은 각 시대가 직면한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여 다르게 나타나는 복지유형의 형태에 따른 것이다. 한국 가톨릭 아동복지사의 제1단계는 박해시대부터 해방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의 아동복지 유형으로는 「위탁양육」에서 「시설보호」로의 전환을 들 수 있으며 제 2단계는 해방 이후부터 1960년까지로 「시설보호사업」, 「입양사업」이 위주가 되었던 단계이다. 제 3단계는 1960년 이후부터 1980년까지로 「소공동체(Group Home)」형태의 보호사업이 주종을 이루던 때였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0년 이후 현재까지를 들 수 있다. 이 때는 「아동복지를 위한 새로운 투신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단계 가운데 본고에서는 해방이후 50년간에 이르는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 통계자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1953년 이후부터였다. 1953년 한국동란 이후 천주교 전국 아동복지시설의 현황을 도표를 통해서 알아보면서, 천주교 아동복지와 정부의 시책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겠다(도표 참조).

박해시대부터 해방 이전

이 땅에 가톨릭 신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박해시대 교회의 아동복지 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영해회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1854년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서 착수되었고, 박해라는 상황 하에서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1857년에는 「영해회 규칙」이 반포되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1880년 재개되었다. 1885년에는 시설을 확장하여 「천주교 보육원」이라 칭했다.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운영권을 넘겨 줌으로 써 고아보호 사업의 모체가 되었고, 당시의 수용고아 인원은 2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 때 아동복지 사업은 박해시대 「위탁양육」의 형태를 벗어나 「시설보호」중심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하여 서울 뿐만 아니라 대구, 인천 등지에도 보육원이 설립되었다.

한편,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도 아동복지사업은 개항기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1934년도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경성, 부산, 청진 등의 총독부 시설 탁아소에 3백19명의 아동이 보호되어 있었고, 사설 육아시설에 수용된 인원이 2천1백92명이었다. 이 중 교회시설에 수용된 아동수는 경성에 1백72명, 인천에 75명, 대구에 7명으로 총 3백17명이었다. 일제시대 교회는 총독부 당국에서 운영하던 시설과 대등한 숫자의 아동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해방이후∼4ㆍ19 이전

당시 한국사회는 전쟁이란 어마어마한 사회적 위험 속에 갑자기 늘어난 고아, 미아, 기아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당면과제였다. 일제의 간섭이나 공산정권의 방해에도 꿋꿋이 버텨오던 교회의 아동복지시설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교회는 이들 고아들을 함께 피난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하였었다. 또한 기존의 고아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에서는 전시중에도 시설을 설립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전쟁은 미망인으로 인한 모자세대 아동, 소년소녀 가장, 혼혈아동, 불구가 된 장애아동, 빈곤가정 아동 등 풀어야 할 사회적 과제를 양산했다. 교회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외국 선교단체의 원조에 의존하였으며, 1955년 한ㆍ미 간에 민간 구호활동에 관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활동해오던 외원기관이 합법적 근거아래 197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이들 사회사업 기관에 대한 총 지원금은 1953-55년에는 대략 3천3백만 달러에 이르렀으나, 차차 줄어들어 1968년에는 9백만 달러 정도에 머물었다. 1957년 보사부의 결산액이 9억3천5백만원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당시 원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사회복지에 큰 기여를 하였던 외원단체들은 총 1백13개 단체였는데 이 가운데 교회단체로는 16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아동복지는 혼혈아를 우선으로 해외 입양사업과 시설보호사업이 그 주류를 이루었었다. 한국동란으로 인한 폭발적인 수요를 충당하려는 사회적 요구에 의해 정부차원의 시설확충도 많았다. 1959년의 현황에 의하면 정부기관의 영ㆍ육아시설이 4백67개였고 불구아동시설 8개, 탁아시설 9개 허약아시설 2개, 부랑아시설 37개 등의 아동복지시설이 총 5백23개에 이르렀다. 도표에서 보듯 교회의 시설은 53년 23개, 55년 33개, 59년 28개로 숫자로는 정부기관과 비교가 안되는 숫자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 계통의 사회복지 사업은 한국 인구 중 천주교 신자가 차지하는 백분비와 비교해 볼 때 월등히 높은 것이었고, 서비스의 질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1960년 이후∼1980년

이 시기는 한국의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차차 외원단체들이 철수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시설들이 문을 닫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천주교 보육원은 1978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으나 1894년에 시작된 인천 해성보육원은 현재까지도 90여 명의 아동을 돌보고 있다. 이는 전쟁이후 사회변동으로 인한 수요의 감소도 있었겠지만 그동안 잠재되어 왔던 시설보호의 문제점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결과였다. 교회에서는 시설보호의 폐단을 감지하여 1963년에 한국 SOS 어린이 마을을 설립하였다. 이 기관은 요보호아동을 가정적 분위기속에서 양육하고 퇴소 후에 독립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자립능력을 배양시키고 있었다. 현재는 대구, 서울, 춘천 등지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외원단체의 철수 이후 교회의 아동복지에 미약하나마 정부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8년 마리아 수녀회에서 서울 소년의 집을 위탁관리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해서 오늘날 많은 수도단체에서 정부시설을 위탁 경영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70년대로 이어지는 정부의 공업화, 경제개발 정책은 농촌의 피폐로 인한 대도시로의 인구유입, 결손가정의 증가와 기혼여성의 사회적 노동참여 등의 현상을 낳았다. 이로써 도시빈민, 부랑아, 고아, 기아의 발생이 또 다른 「사회적 위험」으로 대두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빈민지역이 형성되었다. 교회에서는 이들 지역의 아동들이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로써 부모가 일터에 가 있는 동안에 열악한 환경 속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음을 알았다. 뜻있는 평신도와 수도자들은 이들 지역에서 골목 유치원, 애기방, 놀이방 등의 사업을 펼쳤다. 1968년 정부는 민간탁아소를 권장하기 위하여 미인가 탁아시설 임시 조치령을 공포하였다. 1976년에는 탁아소가 전국적으로 6백7개에 이르렀으나 1977년 사회복지법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탁아소의 법인화를 장려하는 동시에 미인가 탁아시설 임시 조치령을 폐기하였다. 이후 탁아사업은 위축되면서 수적인 감소현상이 나타났다. 일반 탁아시설의 감소는 교회 시설의 상대적 증가를 요구하게 되었다. 도표에서 보듯 이 시기의 교회시설의 수치에는 어떤 큰 변화가 없다. 이는 교회가 불투명한 정부의 정책에도 흔들림 없이 기존의 시설을 유지 관리해 왔음을 뜻한다. 교회에서는 정부의 재정적, 정책적 보조를 받지 못한 사각지대 속의 아동들을 돌보기 위한 자원봉사자 중심의 활발한 활동이 펼쳐져 나갔다. 또한 1976년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탄생되어 자생적으로 조직된 단체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1980년 이후∼현재까지

이 시기 한국에서는 특히 한국교회의 신도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숭고한 자원봉사 정신을 꽃피웠다. 또한 이 시기엔 소외계층에 대한 교회의 관심 역시 매우 컸었다. 아동복지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사회 정의 확립을 위한 교회의 노력과 병행하여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때 민간, 사회, 종교단체와 개인들에 의해 빈민 거주지와 공단지역에 설립된 비영리 탁아시설은 89년 10월말 전국적으로 2백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이 탁아시설 가운데 상당수는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1988년 2월 서울시 및 경인지역의 도시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유아원과 공부방에 종사하고 있는 자원봉사 교사들의 긴밀한 정보교환과 연대활동을 위한 「가톨릭 지역 아동 연합회 」가 발족되었다. 또한 1993년 2월에는 「가톨릭 공부방 협의회」가 발족되어 실무자, 교사 재교육, 교육 프로그램 계발, 지역주민ㆍ부모 교육 프로그램 계발, 영성 교육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밖에 청소년 기관으로는 수도회와 개인이 운영하는 소공동체로서 「나눔의 집」 16개소와 청소년 가장을 돕는 장학 후원회, 재수생을 위한 까르딘 상담터 등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서는 성가정 입양원을 설립하여 국내 입양과 「사랑의 부모맺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입양을 원하는 아동들이 적절한 국내 입양가정을 찾을 동안 일시적 보호가정을 찾아주는 「위탁양육」형태의 사업이다.

1993년 문민정부 이후 정부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으로써 그동안 교회가 맡아왔던 몫을 감당하고 있다. 또한 교회의 노력이 평가되어 동부 시립아동상담소를 위시하여 어린이집 등 정부의 많은 시설을 교회단체에서 위탁 관리되고 있다.

도표에서 1994년 이후의 시설수치가 늘어난 것은 교회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소공동체 형태의 시설들이 그동안 활발한 활동의 결과, 일반사화와 교회에 새롭게 알려지게 되어 시설로서 새롭게 인지되었기 때문이며 정부의 위탁시설이 늘었기 때문으로 본다.

맺음말

오늘날까지 교회는 정부가 미처 시행하지 못하거나 과오를 범하였던 아동복지의 많은 부분을 묵묵히 앞서 실천함으로써 그 공백을 메우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앞으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 몇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새로운 빈민지역으로 대두되는 임대 아파트 지역내의 빈곤가정 아동을 위한 구체적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물질 만능주의, 도덕관의 상실 등으로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동, 불의의 사고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동 즉, 자신의 생계를 아동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신자 가정과의 적극적인 결연사업을 펼쳐 교회차원에서 보호해야 한다. 셋째, 퇴색되어 가는 자원봉사 정신을 다시금 배양시키며 자원봉사자들의 전문적인 교육 및 총체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넷째, 교회가 지역사회학교(Community School)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약물중독, 가출청소년, 학교폭력 등으로 괴로워하는 아동들에게 항상 적절한 상담을 통해 치료 및 예방을 해줄 수 있도록 전문적인 상담원을 상주시켜 결손가정이 아닌 일반가정의 아동들도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아동학대(정신적, 육체적)를 막고 아동을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할 수 있도록 건전한 부모상, 즉 「새로운 성가정상」을 신자가정에 교육시켜야 한다. 여섯째, 주일학교 교육을 강화하여 신앙교육 뿐만 아니라 어린이 사도직 운동(MIDADE)을 강화시켜 정의로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줄 수 있어야 한다.

조화영ㆍ대학강사ㆍ사회복지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