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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대전교구 금사리본당 (끝)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2-03-20 수정일 2012-03-20 발행일 2012-03-25 제 2788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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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발전 구심점 역할 해낸 신앙 못자리
박해 피해 외딴곳에 설립됐던 부여지역 최초의 고딕식 건물
9년 복원사업 옛 모습 되찾아
한국교회 초기, 전국 곳곳의 교우촌들은 인근 지역 복음화의 구심점이었다. 이러한 교우촌은 박해 세력이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빠른 속도로 늘어 갔다. 신앙을 짓밟으려는 박해가 도리어 전국적인 신앙 전파의 도구로서 활용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이후 1886년 조선이 프랑스와 수호조약을 맺으면서부터, 외국인 선교 사제들의 사목 활동을 바탕으로 한국교회 본당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본당 사목은 교회가 각 지역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고,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임을 증명하는 활동이다. 초기, 많은 본당이 교우촌이 자리한 산속 혹은 외딴곳에 터를 두어 선교활동에 어려움도 컸지만, 그 덕분에 대부분 본당의 역사뿐 아니라 성당과 유물 등을 훼손없이 지켜올 수도 있었다. 1882년 명동본당 설립 이후 1900년에는 40개, 1910년에는 54개, 1920년(경)에는 242개였던 본당 수는 현재 1600여 개로 크게 늘어 한국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뿌리를 넓혀가고 있다.

특히 오랜 역사를 가진 각 본당들은 신앙 전달뿐 아니라, 각 지역과 국가 전체의 크고 작은 일을 함께해 온 근간으로서 교육과 지역 사회사업 등에도 큰 힘을 제공해왔다. 특히 각 본당의 역사는 한국교회를 성장, 성숙시키는 신앙의 밑바탕이다. 이 때문에 본당 역사를 돌아보는 과정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선조들의 믿음생활을 널리 알리고 본받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성숙을 도모하는데 의미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의 마지막 탐방지인 대전교구 금사리본당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본다.

충남 부여 지역은 일찌감치 복음이 전파된 곳이었다. 기록상으로도 1801년 신유박해 전후부터 이미 신자들이 거주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인근 공주와 논산 등과 비교해서는 신자 수가 적은 편이어서 1866년 병인박해 전까지는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 신자 수가 급증한 때는 병인박해 이후였다. 곳곳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공소도 속속 설립됐다. 부여에는 1881년 고당공소가 처음 설립되면서 본당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의 기틀이 마련됐다.

1901년에 설립, 지역사회 신앙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한 대전교구 금사리성당.
금사리본당(주임 이범배 신부)은 1901년 공주본당에서 분리, 신설됐다. 당시 본당은 지역의 사회·경제적 규모 등과 관계없이 교우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본당터로 최종 확정해, 현재 다른 본당에 비해서는 다소 외딴 지역에 자리한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은 많은 경우 산이나 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 잡긴 했지만, 이후 교통이 편리하거나 도심이 형성되는 지역으로 본당을 옮기거나 새로 설립하던 사례와는 다른 점이기도 하다.

금사리본당은 설립 이후 지리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선교활동을 펼쳐 예산과 서천, 장항, 규암, 홍산본당 등을 분리, 신설하며 충남 남서부 지역 복음화에 큰 역할을 해왔다.

초대 주임 줄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신부는 당시 안성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앙트완 공베르(Antoine Gombert) 신부의 동생으로 1900년 한국에 들어와 이듬해 4월부터 금사리본당 사목을 맡았다.

공베르 신부는 부임 당시 한 달여 간은 신자 집 사랑채를 개조해 성당으로 사용하다 새 성당 건립에 돌입했다.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성당은 부여 지역 최초의 고딕식 건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특히 이 성당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형 평면과 내부 중앙에 나무 기둥을 일렬로 세워 전례공간을 둘로 나눈 2랑식(廊食) 형태를 보여, 건축사적으로도 중요성을 더한다. 본당은 설립 100주년 준비 노력의 하나로 지난 1998년부터 9년에 걸쳐 옛 성당을 복원한 바 있다.

금사리본당도 여느 본당과 같이 지역 주민들의 교육에 큰 관심과 지원을 펼쳐왔다. 특히 본당은 1924년 성당 사랑채에 계명 여자 학술 강습회를 열고 당시로서는 매우 등한시했던 여성 교육을 폭넓게 지원한 바 있다. 본당 역사에서 단연 눈에 띄는 단체로는 청년회를 꼽을 수 있다. 본당은 1922년에 이미 청년회를 조직해 성당 운영과 지역사회 활동에 활발히 나섰다.

1950년대에는 마을에 전기를 끌어들이는 지역사회 개발 사업 등을 비롯해 예비신자 교리반과 각종 본당 행사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마련해 교회를 널리 알려 가는데 힘을 실었다. 무엇보다 본당은 충남 서남부 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다수의 성직·수도자를 배출해왔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은 금사리본당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주임이었던 몰리나로 신부는 공산당이 성당과 부속 건물을 몰수하고 모든 전례 활동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을 지키다 대전으로 압송,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대전 프란치스코 수도원 지하실에서 총살당한 바 있다.

이후 본당은 1968년 새 성당을 건립하고, 신용협동조합 설립과 밤농장 운영 등을 통해 본당 운영 활성화 등에도 박차를 가해왔다. 현재 지역사회 고령화 등으로 본당 교세는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지만, 깊게 내린 신앙의 뿌리는 복음화를 위한 마르지 않는 샘물을 지키고 있다.

1968년에 설립한 새 성당 모습.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