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1 김대건 신부 5대손 김선태 신부 가정

최정근 기자
입력일 2012-03-20 수정일 2012-03-20 발행일 1996-07-14 제 201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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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와 사제성소 만개… 세 동생도 곧 서품
“이제야 비로소 성 김대건 신부 후예" 자긍심
가난 중에도 소박하게 하느님 의지하며 생활
그리스도 향기 솔솔 피는 삶… 신앙인들의 귀감
반듯한 가정에서 반듯한 사람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돈독한 신앙인이 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좋은 가정 반듯한 가정이 사회의 근간을 이룰때 그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가정의 붕괴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가정의 붕괴와 가족의식의 파괴는 현재 온갖 사회문제의 근원을 제시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가정의 소중함을 통해 사회의 전도된 가치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본보는 온갖 문제로부터 도전받고 있는 가정의 위기시대에 꿋꿋하게 가계를 지키고 발전시켜온 가정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사회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풍성한 가계를 이룩하고 있는 이들의 가정을 토대로 우리 사회의 가정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는 가계(家系)를 중시 여기는 전통을 갖고 있다. 집안의 혈통을 중심으로 가문 나름대로의 문화와 의식 그리고 자랑거리가 대를 거쳐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족보를 펼쳐 보이며 집안의 내력을 들려주곤 하는 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있다.

올해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꼭 1백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성인의 순교영성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성인과 피를 나눈 형제들 후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성인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성인과는 무관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을까? 한번쯤 의문을 가져볼만하다.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충청도 솔뫼지역에 대대손손 살아온 부친 성 이냐시오 김제준과 고 우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 신부 가계의 신앙의 뿌리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인 김운조(비오)씨부터 시작된다. 운조는 당시 내포지방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이존창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특히 이존창의 딸인 이 멜라니아가 운조의 둘째 아들 택현에게 시집을 오면서 김해 김씨 가문에 신앙의 꽃이 피게 된다.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의 아들이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임을 볼 때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진외가 사촌간이 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운조는 당시 내포지방(오늘의 충청도 당진 인근)의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한 양반집안이었다고 한다. 그 역시 1814년 12월1일(음력10월21일)해미 옥사에서 순교하였고, 순교의 역사는 그의 둘째 아들 한현, 셋째 아들 택현에 이어 택현의 둘째아들 제준 그리고 증손자인 김대건 신부에까지 이른다.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지 꼭 1백50년이 되는 올해 그로부터 4대가 지난 그의 방계(작은 아버지의 자손)에 와서야 비로소 사제가 탄생한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는 후손으로서 이제야 『고개를 들고 조상을 대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대전교구 천안 쌍용동 본당 주임 김선태 신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작은 아버지인 제철의 자손이다.

김선태 신부의 부틴 김종원(요한)씨와 이상기(데레사)씨 사이의 8남매중 장남인 김 신부는 성인의 후손답게 따뜻한 목자로 사목활동에 열성적으로 임하고 있다.

그의 형제들 역시 성인의 후손임을 자랑함에 부끄럼이 없다. 4남4녀 중 신부1명, 수녀1명 신학생 3명이 현재 수학중에 있다. 대가 끊기게 되는 불상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김선태 신부 바로 밑 동생인 현태씨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이탈리아에서 유학중에 있다. 또 3남인 용태는 군을 제대하고 현재 서울 신학교 3학년에 복학해 있고 막내인 성환은 대전 신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있다. 막내 성환이 신품을 받으면 4형제 모두 사제가 되는 기록을 갖는 셈이다.

여자 형제들 역시 장녀 인숙(엘리사벳)씨 만이 출가하고 밑으로 성가소비녀회의 미숙(성문 가를로)수녀와 김선태 신부의 식복사로 있는 지숙(안나)씨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라고 이름을 지은 막내딸 순천(아녜스)씨는 아직 성소의 길을 결정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성인의 후예다운 결정을 할 것이라는 게 부모들의 생각이다.

이들의 아버지 김종원씨는 『이제야 비로소 성인의 후예라고 자랑(?)할 수 있게 됐다』면서 『김대건 할아버지의 후손인 친인척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할아버지의 길을 따라 간이가 드문 것 같은데 내 자식들 대에 와서 이렇게 성소가 꽃피운 것은 아마도 김대건 할아버지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남인 선태 신부 역시 『성인의 후예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지만 항상 부끄러웠다』고 털어놓으면서 『성인의 전구로 막내까지 사제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랑스런 후예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성인의 후예. 말 그대로 정말 자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 순교 성인들의 후예들은 조상들의 신념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가난하게 살고 있다. 포졸들의 포위망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산골로 산골로 숨어들어가 살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후손들은 그렇기 때문에 학문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조상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더없이 가난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다.

김대건 신부의 후예들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성인의 친동생인 난식만 보더라도 머슴살이를 하다 출가했지만 자손이 없어 양딸을 얻어 키웠을 뿐 그 후손들의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이같은 이유에 대해 호남 교회사 연구소장 김진소 신부는 『숨어 살다보니 친척들끼리도 왕래나 연락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서로 연락이 끊겨 남남처럼 살게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대부분 항아리 굽는 일에 종사하는 등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김대건 신부의 작은 아버지 즉 제철할아버지의 후손들만이 지금 서로 왕래를 하고 있을 정도다. 바로 김선태 신부와 그 형제들이 제철할아버지의 5대 후손들이다.

제철할아버지는 김대건 신부의 사촌형제들인 의식, 진식, 근식 3형제를 두었다. 3형제중 장남인 의식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항아리를 굽는 것을 업으로 살고 있다. 김선태 신부의 사촌형제인 영태씨는 현재충북 청원군 강외면에서 항아리를 구으며 선조들이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김선태 신부의 할아버지 윤배는 제철할아버지의 장남인 의식의 친손자 였으나 작은아버지 현동의 손이 없어 출계, 족보상에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로 게재되어 있다. 즉 선태 신부의 핏줄은 제철할아버지의 장남 의식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 김대건 신부의 후손들은 단명하거나 손이 귀한 것이 특징이다. 가톨릭 집안의 전통상 형제가 많은 것이 당연하지만 박해와 질병으로 인해 대부분 독자이거나 4형제를 넘지 않고 있다.

김선태 신부의 부친 김종원씨는 『내 아버지만 하더라도 출계해서 장남으로 호적에 오를 정도로 손이 귀했고 나 역시 외아들이었다』며 『이처럼 자손이 귀하다 보니 사제성소가 적었던 것 같다』고 사제성소가 열악했던 나름대로의 이유를 밝혔다.

김종원씨에 의하면 김해 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의 아산공파에 속하며 가톨릭 신앙의 시조인 김운조(비오)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진 가문에는 순교자만해도 운조할아버지를 비롯 운조의 3남 택현, 택현의 차남 제준, 제준의 장남 지식(대건) 등 내리 4대와 한현(종한)의 딸인 당고모 데레사와 당고모부 손연옥 그리고 김 신부의 5촌 숙부인 제항, 7촌 숙부 제교 등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김 신부의 4촌인 근식과 선식 및 역시 김 신부의 4촌인 경배의 부인 등 총 11명이 순교했다고 전한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1백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사제성소의 열매를 보게 된 가계안에는 성인의 영광이 드리워져 있는 반면 또한 아직도 서슬이 시퍼런 박해시대의 아픔이 잔재해 있다.

대체로 김대건 성인의 후손들은 본인들의 의지든 아니든 간에 세상에서의 입신출세와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 조상이 흘린 순교의 피로 인해 때로는 가난을 원망하면서도 소박하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를 40년이 넘도록 하면서 8남매를 키워, 아들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한 김선태 신부의 부친 김종원씨나, 한국인 첫 사제의 어머니가 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술라 여사의 가난과 처참한 죽음은 시공을 초월해 성인의 영광을 빛낸 숨은 공로자임에 틀림없다.

1백50년의 시공을 초월, 사제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김선태 신부 그리고 3명의 동생 신학생들의 모습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의 후손이어서라기 보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순교의 피가 면면이 흐르는 참 신앙의 명가(名家)로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가계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될 모델이 될 수 있다. 그 안에는 조촐하지만 뜨거운 신앙의 피가 면면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정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