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 김대건 신부 시성 12주년ㆍ순교 1백50주년 기념] 님의 발자취 따라 9 귀착지 황산포구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3-19 수정일 2012-03-19 발행일 1996-06-30 제 200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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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린 갑판… 성모님께 전구하며 조국으로 항해
감격의 고국땅…「영광의 날」 향해
죽음을 넘나들기 40여 일… 그리운 고향에 
눈에 띌까 상복차림으로 황산포 첫 발 
난관도 잠시 혹독한 박해의 그림자가…
파도가 쉴 새 없이 뱃전을 할퀴고 있었다. 격류를 헤치고 간신히 나루터에 도착한 라파엘호는 어둠 깊이 닻을 던지고 가느다란 몇 점 횃불에 의지해 한 달이 넘도록 가슴에 품었던 사람들을 갯벌에 내려주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최초의 방인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 처음으로 고국의 땅을 밟았다. 마중 나온 사람이 둘, 야음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고도 조용하게, 비참할 정도로 초라하게 내딛은 첫 발자욱이지만 성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번져오는 감격을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제물포에서 상해로 상해에서 다시 황산포로 구도자들을 실어 나르던 라파엘호는 바닷바람과 파도에 씻겨 만신창이가 됐지만 조선땅은 한꺼번에 셋이나 되는 목자를 맞는 감격을 누린다.

1845년 10월12일. 김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를 포함해 모두 12명이 불과 길이 25척의 조그만 돛단배에 몸을 싣고 상해를 떠난지 40여 일 만이다. 8월31일 라파엘 대천사의 수호 아래 선원들은 용감하게 중국땅을 나섰다. 하지만 한조각 엽편(葉片)에 몸을 실은 이들은 바다 항해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뱃사람의 완력도 없었다.

긴 항해에 갑판 한쪽은 무너져 나갔고 돛대는 잘라야 했다. 해류에 몸을 맡긴 이들은 뭍을 보고 환호했으나 그곳은 목적지에서 천리나 엇나간 제주도였다. 겨우 북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려 도착한 곳이 금강 하류 강경 인근 황산포구이다.

당시 상황을 페레올 주교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장 바랑(Barran)신부에게 10월29일자로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비밀리에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상복 차림으로 배에서 내리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굵은 베로 만든 겉옷을 걸쳐주고 머리에는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를 씌웠습니다. 발에는 미투리가 신겨졌습니다. 내 차림은 몹시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내 취임은 그리 찬란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서한에서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서 떠날 때부터 풍랑을 만나고 해류에 밀려 제주도로 표류하기까지, 그리고 황산포에 도착한 후 들은 조선의 상황까지를 길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명 화산리.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논산 인터체인지에서 내려서 연무를 거쳐 강경, 거기에서 10분 정도 달리면 길가에 나바위 성당의 뾰족한 꼭대기가 보인다. 올라 앉아 있는 언덕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위가 워낙 드물게 넓은 평야라서 눈에 쉽게 들어온다.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화산(華山)」이라 부른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에는 광장 같이 너른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서면 저 아래 황산포 나루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화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나바위 성당은 바로 이 너른 바위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가 산 위에 있었고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도 불렸다. 인근에 있는 강경은 조선시대 3대 어장의 하나로 번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뭍으로 변해 길이 나고 논과 밭으로 변했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지금도 길 한 켠으로 배들을 잡아매던 흔적이 있다고 일러 준다. 원래 바다를 거슬러온 물줄기가 금강 하류와 함께 뒤섞여 화산 위의 너른 바위 밑에까지 넘실거렸는데 일제시대때 위쪽에 댐을 쌓으면서 물이 줄어들었고 지금처럼 마른 땅이 됐다고 한다.

언덕을 올려다보면서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면 자줏빛 벽돌로 벽을 쌓고 기와를 얹은 데다가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앞에 세워 둔 성당이 나온다. 사제관과 함께 지방문화재(사적318호)로 지정돼 있는 성당이 세워진 것은 1897년이다. 1906년 완공된 성당의 설계는 명동성당의 포아넬 박 신부가 도왔고 벽돌공과 목공일은 중국인들이 맡았다. 원래는 한국 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졌었는데 1916년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꾼 것이다. 이 성당은 정면 5칸, 측면 13칸이었는데 내부 열주(列柱)사이에는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했었다.

성당 뒤편으로 언덕을 마저 올라가면 돌로 조각된 십사처가 구비구비 길따라 세워져있고 그 끝에 너른 바위가 나온다. 바위 위에는 망금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가 매년 연례피정을 하던 곳이다. 정자 앞에는 김 신부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본따서 만든 김대건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1백년의 역사를 지닌 나바위 성당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서북지방에 있는 공소를 관할했다. 1929년 당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자수가 3천2백여 명에 이르렀고 안대동본당(현 함열본당), 군산(현 둔율동본당), 이리(현 창인동본당)본당 등을 설립, 분리시켰다.

일제시대와 6ㆍ25 등을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 한 나바위 본당은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이는 1947년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일제에 의해 1937년 폐교를 경험한 바 있다. 1941년 여름에는 김영호 본당신부가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감되기도 했다.

1949년부터는 간이진료소라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해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을 보살폈다. 특히 6ㆍ25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성당을 지킴으로써 단 며칠을 빼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됐다.

내년이면 설립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 성당은 1989년 「화산」과 「나바위」로 함께 불리던 본당 명칭을 본당 설립 초기의 「나바위」로 확정하고 「나바위 성당 1백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1991년 10월 피정의 집을 완공하는 한편 1백주년 기념집을 준비하고 있다.

김 신부는 이곳 나바위에 도착한 후 11월과 12월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 등을 방문한다. 은이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蘭植)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그가 조선에서 행한 사목활동의 전부였다.

1836년 가족과 고향을 떠난 지 9년만에 그는 사제로 돌아왔다. 화려한 금의환향이어야 할 귀로는 오히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은밀한 길이었다. 아니 그동안의 고초를 능가하는 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성인은 이미 그것이 하느님이 안배하신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