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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냉담했나] 18 낙태로 인한 갈등 끝에 냉담

전대섭 기자
입력일 2012-03-19 수정일 2012-03-19 발행일 1996-05-26 제 200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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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원인 분석/그 예방을 위한 기획
시집의 「아들」강요에 그만… 
외짝교우로 한계… 아직 성당나갈 자신없어

결혼 11년째인 김숙자(가명)씨는 두 딸을 둔 평범한 가정의 주부다. 그러나 두 딸을 두기까지의 길지않은 시간동안 그녀의 생활은 많은 부분 갈등과 울부짖음,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행복」이라는 꿈을 안고 출발한 김씨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첫 딸아이를 낳으면서부터. 『남편이 장남인데다 시집에서도 유독 아들에 대한 욕심이 심했다. 아들이 귀한 집이어선지 몰라도 첫 아이를 낳은 후 시집 식구(그녀는 시어머니란 표현을 하지 않으려 했다)들이 날 대하는 것이 틀려졌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 김씨의 고백이다.

『서운해서 저러겠지,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삼던 그녀는 그러나 시어머니의 냉랭한 반응에 갈수록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김숙자씨는 여고시절 영세 입교했다. 친정 고모말고는 가족 중 천주교 신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때도 신앙의 문제는 염두에 두지 못했다고 한다. 친정에서도 신자인지 아닌지 따질리 없었고, 「나홀로 신앙」에 익숙해 있던 그녀로서도 이것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첫 아이 돌도 채 되기전, 시어머니의 은근한 강압이 시작됐다. 『빨리 동생을 가지지 않느냐』는 둥 『이번엔 꼭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아들욕심도 크게 다를바 없어 김씨는 가정 안팎으로 시달려야 했다.

둘째 아이가 생기고 난 뒤 기쁨도 잠시. 『어느날인가 집에 들어와 보니 텔레비젼 위에 돈 30만원이 있더군요. 남편이 남긴 쪽지와 함께』.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딸 아이 같다는 말을 들은 남편이 그 사실을 시어머니에게 일렀고, 시어머니는 남편을 통해 아이를 지우는데 써라며 돈을 놓고 간 것이었다.

『그 순간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며 서 있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고 억지 위안도 해보았다. 김씨의 첫 낙태 경험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김씨는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 애썼다. 쁘레시디움 총무를 맡기도 했다. 외짝교우로서 늘 남편도 성당에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씨는 죄책감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먹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후 몇년간에 걸쳐 김씨는 두번이나 더 이런 일을 겪어야만 했다. 두번째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병원을 찾았고, 세번째는 자포자기한 상태였다고 한다.

『성당에선 이런 문제로 상담을 한다든가 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쉽게 용기도 나지 않았고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찾아갈 엄두를 못냈지요』. 비슷한 처지의 주부들이나 동료들에게 약간이라도 속을 내비치며 위안을 삼으려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세번씩이나 겪고 난 뒤 제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하느님 앞에 나가겠습니까. 제 뱃속에 잉태된 생명을 죽인건 바로 접니다. 누가 강요했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은 제가 저지른 일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 뒤로는 그러나 어떠한 대가나 비난으로도 씻겨질 수 없는 멍에에 대한 깊은 후회가 가득 묻어나왔다.

또 이렇게 항변하는 것도 같았다.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너무나도 큰 한계에 부딪혔다』고.

네번째 임신에서 김씨는 누구의 말도 강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담담해진 마음에 이번에는 내가 함께 죽겠다는 각오로 맞섰다. 그렇게 낳은 둘째 딸은 지금 집안의 재롱둥이로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다.

『늦게 본 자식이어서 그럴까』하고 생각하다가도 『변화된 남편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때 끝까지 버티지 못했던 제가 더 한심스럽고 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김씨는 말했다.

『아마 저같은 경우가 없지 않을 겁니다. 교회가 정말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이끌어줄 수 있는 보호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빌고 새 삶을 찾기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직 자신이 없다』며 대답을 피했다. 『낳아 놓으면 다같은 자식인데』라며 김씨는 말끝을 흐렸다. 김씨는 7년째 냉담중이다.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