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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대구대교구 김천 황금본당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2-03-13 수정일 2012-03-13 발행일 2012-03-18 제 278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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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포격에도 성당은 훼손되지 않아
박해 피해 이동하던 신자들
교통 요지에 교우촌 형성
신앙·교육 구심점으로 성장
1866년 병인박해 이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도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백산맥 너머에 있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신자들은 마잠, 먹방이, 장자터 등을 비롯한 여러 개의 교우촌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882년부터 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지방 전역을 순회, 선교활동에 나서면서 김천 지역에서도 복음화 활동이 본격적인 싹을 틔워 나갔다.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본당’의 모습을 드러낸 곳은 김천본당(현 김천황금본당)이었다. 본당 설립 당시 신자 수는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10여 가구 20여 명뿐이었지만, 이들이 심은 신앙의 뿌리는 김천을 넘어 문경과 상주, 안동, 예천 등지에서도 복음화의 열매를 키워냈다.

예로부터 김천 지역은 대구와 대전의 중간에 위치, 동북쪽으로는 문경과 상주, 동남쪽으로는 성주와 진주, 서쪽으로는 거창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손꼽혔다.

박해를 피해 이동하던 신자들은 교통 요지였던 이 지역을 더욱 자주 오가게 됐고, 덕분에 복음말씀도 자연스레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앞서 200여 년 전 이미 김천 지역민들과 가톨릭교회와의 만남이 있었다는 기록도 눈길을 끈다.

1801년 박춘산은 ‘천주학’을 믿은 죄로 김산읍(김천의 옛 이름)에 유배됐으며, 같은 시기 부산 동래 출신인 현계탁도 형이 신자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이유로 김산고을 증산으로 유배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신유박해 때 박해의 가해자 측인 조선 조정과 지방관청의 입장에서 천주교 박해 관련 내용을 기록한 「사학징의」를 통해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김천 황금본당(주임 김두찬 신부)은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과 가실본당(현 낙산본당)에 이어 대구대교구 세 번째 본당으로 문을 열었다.

김천 지역 복음화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김천 황금본당의 예전 모습.
당시 가실본당 2대 주임이었던 김성학 신부는 보다 폭넓은 선교활동을 뒷받침하기에는 본당 위치가 부적절하다고 판단, 본당 이전을 추진했다. 후보지는 본당 관할 지역 전체 중 중간 즈음에 자리한 김천 마잠과 군위 법주공소였다.

하지만 법주공소 신자들은 대부분 옹기점에 일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어서 언제 다른 곳으로 떠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김천 지역은 거주 신자 수는 적어도 지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앞으로 교통의 요충지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품고 있어 안정된 선교 텃밭으로 평가됐다.

첫 성당은 자라밭골(현 김천시 황금동)에 자리한 작은 초가집이었다. 곧이어 본당은 빠른 성장세를 이뤄 1907년에는 기와집을 지어 성당으로 봉헌했고, 1934년에는 붉은 벽돌조 고딕식 성당을 신축했다.

김천 황금본당은 처음에는 초가집으로 출발했으나 빠르게 성장을 이뤄 1934년에 고딕식 성당을 봉헌했다. 사진은 봉헌식 당일 모습.
6·25 한국전쟁 중, 치열한 포격전이 연일 이어지는 통에 김천 시가지 전체는 폐허가 됐지만, 이 성당만큼은 큰 상처 없이 제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해 지역사회 명물이 되기도 했다. 옛 성당 종도 봉헌 당시부터 일제에 의해 징발될 위기를 수차례 겪었지만, 본당 신부와 전 신자들이 끝까지 내놓지 않고 보호한 덕분에 해방을 경축하는 맑은 소리를 지역민들의 가슴 속에 전할 수 있었다고.

이 성당은 현재까지도 새로운 성당과 함께 나란히 서 있어, 지난 역사의 정취와 현재의 발전상을 한번에 느끼게 한다.

본당 명칭은 1958년 김천 평화본당이 신설되면서 관할 지역명을 고려해 김천본당에서 김천 황금본당으로 변경했다. 이후에도 김천 황금본당은 지례와 지좌본당 등을 분리, 신설하는 등 김천 지역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탄탄히 자리매김해왔다.

서양문물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산골 마을 어린이들은 특히 서양인 선교 신부들이 공소 순회 등을 나설 때면 그 뒤를 줄곧 쫓아다니곤 했다. 김천 황금본당에서는 이러한 어린이를 비롯한 지역 청소년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성당 구내에 성의학교도 설립했다.

1907년 개교 당시에는 초등과 4년과 고등과 4년제를 운영했으며, 1909년에는 6칸짜리 한옥교사를 새로 세워 사립 천주교 성의학교 인가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결국 운영을 중단한 채 조그마한 학원으로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

성의학교의 역사가 현재 성의고등학교 등으로 이어진 데에는 본당 5대 주임인 최재천 신부의 노력이 큰 뒷받침이 됐다. 최 신부는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자마자 성의학원을 중고등학교로 승격시키는데 혼신을 다했고, 이후 유아교육을 위한 유치원도 설립해 전인적인 교육 지원에 힘쓴 바 있다.

본당 신자들 또한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모범으로 내?외적 복음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자들은 2000년 대희년 새 성당을 봉헌하면서,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천 지방 순교자 유시몬과 동료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순교자 현양비도 함께 세웠다.

새 성당 제대 뒤 십자가도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이 고문당한 형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순교영성을 이어가고자 하는 신자들의 의지를 담은 성물로 꾸며진 성당, 이곳은 신자들뿐 아니라 오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깊은 신앙의 여운을 전해주고 있다.

2000년에 봉헌한 새 성당과 순교자 현양비.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