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34 - Ⅵ 한국 가톨릭교회 사회개발 및 복지사업 3

이한웅ㆍ신협중앙회 회장
입력일 2012-03-12 수정일 2012-03-12 발행일 1996-05-12 제 200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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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서민금융 원조
금융소외 해소…민간 운동으로 뿌리내려
미제레올 신협 조직 확대ㆍ교육에 큰 기여
신상품 개발 등 소득수준에 걸맞는 새로운 전략 필요

신협운동

협동조합 운동의 태동

협동조합 운동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어느 나라이든지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야기된 소생산자의 몰락, 근로자 계층의 궁핍화, 자본의 인간지배 등에 대응하여 분배 정의와 인간화를 구현하고자 생성됐던 것이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대다수 소외계층을 궁핍화시키는 자본주의의 폐해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인간으로 떳떳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과 정의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크리스찬의 당연한 사명이었기에 많은 크리스찬이 협동조합 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즉 협동조합 운동의 발상지인 영국에서는 윌리엄 킹과 많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에서는 루터교의 한 평신도인 라이 파이젠, 장대익 신부 등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그러했다.

해방 전 협동조합 운동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수탈은 이미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시작 되었으며 1910~1918년까지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수많은 토지를 수탈하였고 일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소위 산미증식 계획을 1920년부터 15년간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한국 농민의 광범위한 소작농화를 구체화 시켰다.

이 같은 농민의 몰락과 3·1운동 이후의 팽배한 민족 해방운동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 운동이 일본 유학생, 천도교, 개신교 등 세 개의 그룹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민간 협동조합 운동은 본질상 일제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부단히 탄압받다 일제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점차 군국주의의 마수를 확대함에 따라 1937년경에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이 해방 당시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민족적 이익에 입각한 자발적, 자율적 민주적 협동조합 운동이 아니라 그때까지 한국 농민들을 수탈해온 관제 협동조합인 금융조합이었다.

신협 태동과 사회 환경

1950년대 한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근대적 공업부문과 전근대적 농업부문이라는 이중구조 하에서 임금노동자 계층과 소농, 중소 상공업자 층을 병존시켰다.

이들 소농과 중소 상공업자들은 정상적인 신용획득이 어려워 고리대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극한적으로 삶이 궁핍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협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이의 선구적 역할을 떠맡은 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였다.

더욱 가톨릭교회 소속의 메리가별 수녀는 1900년 미국에서 광산 노동조합 지도자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회 운동에 대한 깊은 인식을 지니며 자라났으며 1930년 메리놀 수녀회 소속으로 평양교구에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6·25 동란시 미국에서 사회사업 공부했다. 1952년 부산으로 돌아와 메리놀 병원에서 구호활동에 전념하던 메리가별 수녀는 1960년 5월 1일 메리놀 병원에서 성가 신용 협동조합을 창립, 신협의 불꽃을 피웠다.

이로써 1930년대 초반 민간 협동조합 운동의 소멸로 인한 30년 간의 역사적 단절 끝에 최초의 자발적, 민주적 신용 협동조합이 탄생한 것이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역사상 중요한 정치적 변혁의 시기였다. 4·19 혁명의 발발로 그동안 제약받거나 억압받아온 사회적 세력들은 4·19 이후 정상을 되찾고자 일어섰고 그 바람은 노동운동과 민주화로 세차게 몰아쳤다.

민주주의와 자립경제 의욕이 팽배하던 이 시기에 자발적, 민주적 협동조합인 신용 협동조합 운동은 외부적 제약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며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던 서민 대중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의 한국경제는 놀랄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이의 성장은 외국자본에 의한 수출 주도형 산업의 성장이었기 때문에 국민 경제의 불균형 성장을 초래했고 이런 상황은 1970년대에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 같은 사회 경제적 불안정과 함께 금융 소외권의 해소욕구, 서민대중의 구매력 향상 등은 신협 성장의 토양이 되어 한국의 신협 운동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편승하여 서민 금융의 역할 수행과 함께 전국적인 민간 운동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한국교회와 신협운동

신협운동사를 살펴볼 때 한국의 신협운동은 가별 수녀와 장대익 신부 등 교회 인사들의 노력에 의해 뿌려지고 자라났다. 더욱 사회적으로 1960년대 한국 국민의 대다수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절망과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개혁하고자 교회 인사들이 벌인 신협 운동은 전 교회적 차원의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 대한 교회적 대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당시 신협 운동을 이끈 교회 인사들은 하나같이 궁핍화와 비인간화로부터 서민 대중을 일으켜 세우는 길의 하나로 신협 운동을 전개했고 이것이 곧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신념에 충만해 있었다.

특히 안티고니쉬 운동의 코디 신부를 비롯한 선구자들은 신협 운동을 하느님의 소명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때문에 초지일관 정열과 헌신으로 이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신협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도움으로써 가난을 추방하고 믿음과 사랑의 기반을 다지는 조직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들과 동고동락하며 현실사회를 직시하고 참여하는 신협은 사랑의 계명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조직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고무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와 같은 신협 운동은 점차 범 가톨릭적 관심사가 되었다.

예컨대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는 신협 운동을 널리 알림으로써 이를 측면 지원했고 가톨릭재단인 미제레올(MISEREOR)등 많은 가톨릭 기관과 인사들이 한국 신협의 발전에 재정적, 기술적, 정신적으로 지원을 했다.

특히 미제레올은 초창기의 조직활동, 연합회 회관 구입, 방대한 규모의 신협 연수원 건립 등에 재정지원을 담당하여 신협 운동의 조직 확대와 교육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로 하여금 신협 운동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회적 행동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한 점은 무엇인가?

한국의 신협 운동은 「잘 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을 3대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 3개의 과제는 서로 연결된 것으로서 교회가 신협운동을 권장하는 이유가 신협운동의 그리스도교적 성격에 기인하므로 인하여 교회가 앞장서서 자발적 협동조합의 개척과 육성에 힘쓰게 되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경제 성향이 지표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으나 이에 따른 경제적 빈곤, 소외계층 또한 증대된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를 통한 신협 발전에의 역할 증대는 날로 증가될 것이다.

신협 운동의 발정방향

신협 운동은 기초적 단계의 협동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안티고니쉬의 교훈도 그렇고 메리가별 수녀도 한국에 신협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협동조합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과 사람과 조직이 필요한데 신협이 이러한 조건을 가장 쉽게 충족시켜주는 수단인 것이다. 이 같은 신협 운동은 1990년대에 들어선 지금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이미 신협은 본격적인 금융 업무를 시작할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즉 기존의 서민 저축기관으로서의 조직과 기반만으로는 대중의 금융수요에 맞추기 힘들게 되었다. 더욱이 격화되는 유사 금융기관과의 경쟁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도 업무 영역의 확대는 필수적인 상황이 된 것이다.

따라서 신협은 계속적으로 새로운 상품개발을 비롯한 유사 금융기관과의 동등한 경쟁조건의 보장 등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며 관련법의 개정에도 힘을 기울여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신협이 경제, 사회적 역할 증대를 위해 잠재적으로 조합원인 대다수 국민들의 욕구에 기초한 조직이어야 한다. 즉 36년 전에는 국민 대다수가 서민이었다. 따라서 신협도 서민 대중을 위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 국민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에 속하게 되며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살게 되므로 이제는 이들 계층을 위한 신협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조합원 참여와 조직 확대를 위한 지도기능 강화와 지역사회 개발사업 등 각종 사회 운동적 측면의 지원과 함께 중앙회는 중앙 금고를 통한 업무 영역 확대로 한 단계 상향된 조직으로 변화시켜 2000년대 ICUP(세계 신협대회)개최국으로서 국제적 위상 정립과 함께 선진화 된 신협으로 거듭 태어나 국민운동으로 승화된 신협 운동을 재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한웅ㆍ신협중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