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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전주교구 진안본당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2-03-06 수정일 2012-03-06 발행일 2012-03-11 제 278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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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목마른 이들에게 교육 기회 제공
1800년대 후반 교우촌에서 시작
박해·전쟁 등 굳건하게 이겨내고
전라북도 선교 교두보로 성장 지속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때는 병인박해 직후였다. 진안본당사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 진안 지역에만 약 40여 개의 교우촌이 자리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기도, 경상도 지역으로 피신한 이들 중 일부가 다시 깊은 산골로 옮겨온 덕분이다.

그 중 어은동은 1900년에 본당으로 승격된 진안 지역의 대표적인 공소다. 어은동본당 설립 당시 신자 수 1000여 명에 관할 공소만도 18개였으며, 그 영향력은 경남 거창과 함양에까지 미칠 만큼 산골본당으로서는 상당한 교세를 펼쳤다.

지금은 전주교구 진안본당 관할 공소로 있는 어은동은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을 잇는 성수산 북쪽 산마루에 자리한다. 예전과 달리 도로가 잘 닦여 있지만, 여전히 깊은 산세를 병풍삼아 자리한 마을 형태는, 1800년대에는 얼마나 깊은 산골의 모습이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현재 공소 인근 마을에 남은 가구는 몇십 채 되지 않지만 대부분 대를 이은 뿌리 깊은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믿음의 뿌리를 지켜가고 있다. 특히 공소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후 너와지붕을 얹은 옛 모습으로 복원됐으며, 마을 하천 길과 다리도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순례객들을 반긴다. 또한 공소 신자들은 옛 교우촌에 관심있는 이들 누구나 마을에 머물며 공소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어은동공소는 1888년 설립, 뿌리 깊은 교우촌의 명맥을 이어온 곳이다. 당시 공소는 전주본당(현재 전동본당) 관할이었지만 신자 수가 늘면서 전주본당에서 분가해 진안과 장수, 남원 일대 복음화를 책임지는 구심점으로 새 모습을 갖췄다.

초대 주임인 김양홍 신부는 부임 직후 옛 공소를 보수, 확장해 목조 7칸 규모의 성당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돌입했다. 김 신부는 한국인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예수성심신학교 입학과 졸업을 모두 거친 후 사제품을 받은 제1대 국내 양성 사제이다. 또 1937년에는 전주지목구장으로 임명돼 한국인 최초의 교구장이 되는 기록도 남긴 바 있다.

신자들이 급증하자 본당은 1909년 새 성당을 마련했다. 이 성당은 너와지붕을 얹은 단층 목조건물로, 외관은 전통 가옥 형태지만 진입 구조나 실내 평면은 전통가옥과 많이 다른 개성을 보였다. 독특한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성당은 현재의 어은동공소 경당으로 지난 2002년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됐다.

2002년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어은동공소 경당.
성당이 세워지자 김양홍 신부도 다른 여느 본당 주임들과 마찬가지로 배움에 목말라하는 학생들을 먼저 배려했다. 김 신부는 우선 성당 사랑채에 영신학교를 열고 국어를 비롯한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며, 2년여 후에는 성당 마당에 별도의 학교를 신축하기도 했다. 당시 진안읍에만 학교가 있어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던 터라 학생들 중에는 40대와 기혼자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곧이어 어은동본당 관할 신자 수는 2000여 명을 훌쩍 넘어서 전주 동남부 지역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깊은 산골에 자리잡은 본당 역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주임신부는 산골에 자리한 본당의 위치상 선교의 폭을 넓히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 본당을 이전한다. 본당을 한들로 옮긴 이 시기 동안 신자들의 영성생활은 더욱 심화, 1925년에는 본당에 성체회가, 1926년에는 영신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또 본당은 성모동굴도 건립해 신자들의 기도생활을 적극 독려했다.

어은동공소의 제대.
1930년대에도 본당은 교육사업을 활발히 펼쳐 해성학교를 설립했지만, 정부 시책에 따라 대지와 건물을 모두 국가에 희사하게 된다. 반면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학술강습소는 활발히 운영돼, 새 신자들이 가톨릭교회를 찾는 새로운 통로가 되기도 했다. 1947년, 어은동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지만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1951년 다시 폐쇄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송남호 신부는 낮에는 인민군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고 새벽 즈음에야 몇몇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또 미사 중에 인민군들의 습격을 받거나 성당에 들이닥친 인민군들로부터 제대와 십자가의 길 등을 훼손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1956년 진안읍 군하리에 새 성당이 완공되면서 어은동과 진안읍, 군상리, 한들 지역 등을 통합 관할하는 진안본당이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진안읍에 새롭게 뿌리내린 본당은 유치원과 성모병원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 발전과 생활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0년 부임한 황인규 신부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 터전 마련을 위해 개간 및 수리시설을 갖추는 대대적인 사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0년대 가톨릭농민회 활동도 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큰 불을 지폈다.

이후로도 본당 신자들은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공소를 신설하고, 새로운 강당과 성당을 신축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지역복음화에 힘써오고 있다. 대희년을 며칠 앞둔 1999년 12월 9일에는 화재로 성당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농사일을 마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곧바로 성당 공사에 나서는 신자들의 정성에 힘입어 새로운 성당도 봉헌, 본당의 깊은 역사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어은동과 진안읍, 군상리, 한들 지역 등을 통합 관할하는 진안본당의 모습.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