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가톨릭 문학산책] 16 프랑스 가톨릭 시와 희곡의 거두 - 폴 클로델

남궁연ㆍ가톨릭대 불문과 교수
입력일 2012-03-06 수정일 2012-03-06 발행일 1996-04-14 제 199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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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피캇’ 듣고 되찾은 신앙, 상징주의-신앙 접목한 문학 추구
성서 통해 세상만물의 의미 조명
시ㆍ희곡 창작이 곧 신앙고백 
하느님 구원 드라마로 일상사 해석
폴 클로델(Paul Claudeㆍ1868-1955)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특한 시와 희곡을 발표한 프랑스의 가톨릭 작가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가의 문학세계를 형성하는데 기초가 된 두 가지 사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상징주의 시와의 만남이요, 또 하나는 가톨릭 신앙으로의 귀의이다.

19세기 말엽 과학적인 사고와 물질주의가 프랑스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클로델은 상징주의의 선구자격인 랭보의 시를 읽고 새로운 정신세계에 눈뜨게 된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 현실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며 이 「상징의 숲」을 통해 절대의 현실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와 만남으로써 그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또한 클로델은 1886년 성탄날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모찬가를 듣는 순간 신앙을 되찾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속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믿었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나 전체를 바쳐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믿었던지 그 후 어떤 책도, 이론도 또 다사다난한 인간사도 나의 신앙심을 동요시키지는 못했다』

이렇게 신앙을 갖게 된 클로델은 차차 상징주의 시인의 예술관에 가톨릭 신앙이 합쳐진 문학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세상에 대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고 던지는 상징주의적인 질문에서 그 「의미」를 창조주의 의도와 바로 바꾸게 된다. 『이것에 대한 하느님의 창조의 섭리가 무엇인가?』여기서 이 시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의 방향이 정해지게 된다.

『모든 생물은 영원의 섭리가 만들어낸 것

따라서 그것은 영원의 표현

영원은 항상 현존하며

모든 사물은 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도다.

그것은 뜻이 없는 책이 아니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낱낱이 적혀있는 책과 같으니

아주 미소한 것들도 그 음절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도다』 (5대시가 중)

이 같이 그는 이 세상을 하나의 책,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서 만들어진 하나의 의미를 가진 책으로 본다. 자연 안에 의도가 깃들이지 않은 것이 없고 인간에게 의미 있는 말을 건네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러한 우주의 책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계시의 책인 성서에 비추어 클로델은 그 의미를 밝혀 나가고자 한다. 성서는 태초의 창조의 뜻이 담겨있는 책으로 이것을 통해서 처음으로 우주 만물의 참 뜻이 밝혀질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한 손을 책 중의 책인 성서 위에 얹고 또 한 손을 우주 위에 얹고 상징의 위대한 탐구』를 떠나는 것이다.

그의 시집 「5대시가」에서 물의 이미지는 하느님 성령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물은 지상의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성령이요, 또한 우주 만상을 하나로 연결시켜서 하느님 안에 총체를 이루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인사하노라, 오 내 눈에 비치는 새로운 세계여. 오 이제 총체를 이룬 세계! 눈에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 전체에 대한 믿음의 신경(信經). 나는 가톨릭적인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노라.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창조의 거대한 음계(音階)가 눈에 비친다!』

시인은 바로 이 음계의 해독자다. 동시에 언어로서 창조주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 태초에 하느님이 『빛이 있어라』하시면 빛이 생겨났듯이 시인의 언어는 각 사물에 천부의 이름을 불러주어서 창조주의 섭리를 밝혀준다. 그 이름을 부르는 시인의 언어는 창조주가 의도한 의미와 자리를 재부여하여 더욱 조화롭고 더욱 정신화된 세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제2의 창조가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나는 우연의 굴레를 벗어난 인간의 위대한 시를 읊으련다. 피조물이 영원과 다시 맺어진 위대한 시를』

결국 시인은 창조주인 하느님 품 안에 우주 만상을 귀의토록 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클로델은 『나의 첫째 의무는 하느님이요, 그분 안에 모든 것을 결합시키는 것, 그리고 나의 소망은 하느님의 땅의 설립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그의 시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희곡세계는 어떠한가? 수많은 희곡작품을 낸 그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드라마가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과 어떻게 맞물리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1922년에 쓴 편의 한 구절이다.

『우리 일상생활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구원을 위한 위대한 드라마의 모방이나 참여가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문을 열 때, 남포에 불을 켤 때, 또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줄 때, 혹은 누구에게 앙갚음을 할 때, 특히 여자와 맺는 신비로운 그리고 고통스러운 관계 속에서…』

클로델이 5년(1919~1924)에 걸쳐 쓴 방대한 작품인 「비단신」은 이 작가의 희곡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 첫머리는 해적의 습격으로 부서진 배의 돛대에 묶인 예수회 신부가 올리는 기도로 시작된다.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마지막 미사를 드리며 동생 로드리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 드린다.

『그가 생각하는 일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복(征服)하고 소유(所有)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당신에게 속한 것이 없는 것처럼, 당신이 계시지 않은 곳이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하느님, 당신 손을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로드리그가 당신에게 가는 길이 밝은 길이 아니라면 어두운 길이라도, 직접적인 길이 아니라면 간접적인 길이라도, 단순한 길이 아니라면 복잡하고 혼잡한 길이라도 당신에게 이르게 하소서. 그가 악을 원한다면 선(善)으로 밖에는 통할 수 없는 그런 악을, 만일 그가 무질서를 원한다면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을 뒤흔드는 그런 무질서를 원하게 하소서… 당신은 그에게 갈망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임을 모릅니다… 그가 천사의 얼굴을 이 생에서 한번 봄으로써 상처받은 인간이 되게 해주소서…』

바로 이러한 기도가 연극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로드리그는 16세기 말 스페인의 탐험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후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고 새로이 정복해야 할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시대의 정복자다. 이러한 로드리그가 프르에즈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상처받은 사람」이 되고 만다. 프르에즈는 아프리카의 스페인 요새의 대장의 부인으로 어느 날 로드리그가 항해 중 폭풍을 만나 아프리카 해안에 기항했을 때 만난 여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의 숙명적인 것이 된다.

『무엇이 그토록 그 사람에게로 부르는 거요?』 『그의 목소리』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부름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만남은 클로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랑의 관계다. 로드리그의 중국인 하인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전생(前生)의 인연처럼 클로델은 남녀의 만남을 창조주의 계획 안에 영원히 새겨진 관계로 인식한다. 두 남녀는 만나는 순간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로드리그와 프르에즈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부르며 가까이 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프르에즈는 이미 결혼한 여자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1막에서 프르에즈는 로드리그에게 가려고 마음을 정한다. 그러나 남편 집을 떠나기 전 신고 있던 비단신 한 짝을 성모상에게 바치며 기도한다.

『당신에게 저를 맡깁니다! 성모님, 저의 신을 드립니다! 당신 손에 저의 불쌍한 작은 발을 간직해 두십시요! 조금 후에는 당신을 보지 않고 당신 뜻에 반대되는 일을 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악으로 내달으려고 할 때 절름발로 가게 하소서! 당신이 막아놓은 방벽을 넘으려 할 때 꺾인 날개로 넘게 하소서!…』

두 사람은 결국 만나지 못하고 로드리그는 아메리카로, 프르에즈는 아프리카로 갈라져 간다.

정복과 소유욕에 불타며 자기 힘에는 한계가 없다던 로드리그에게 처음으로 한계가 생기게 된다. 그는 소유하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프르에즈가 없는 것은 로드리그에게 이 세상 전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갈라져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不在)가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한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다. 프르에즈가 남편이 죽고 곤경에 빠졌을 때 로드리그에게 보낸 편지가 10년 동안이나 떠돌아 다닌다. 10년 후 그 편지가 로드리그 손에 들어오자 로드리그는 「서이도 제도부왕」으로 아메리카에서 계획하고 추진하던 일을 다 버리고 프르에즈가 총독으로 있는 아프리카의 스페인령으로 간다. 로드리그의 배 위에 나타난 프르에즈는 다시 로드리그를 떠나간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서 죽어가는 여인이 되기보다는 그에게 「영원한 별」이 되길 선택한다.

클로델은 남녀의 사랑의 존재 이유를 그 역할에 두고자 한다. 하느님의 섭리 속에 영원히 서로가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서로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로드리그는 프르에즈를 통해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갈증에서 영혼의 갈망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프르에즈 때문에 입은 상처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의 빛이 들어오게 되었다. 결국 프르에즈는 로드리그에게 십자가-고통을 통한 기쁨-를 줌으로써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여인의 힘은 은총의 힘이 되며 인간 사랑의 드라마는 구원의 드라마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클로델의 연극은 일반적인 인간극이면서도 동시에 성극(聖劇)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남궁연ㆍ가톨릭대 불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