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금주의 복음단상] 236 고난이라는 병과 축복/강길웅 신부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2-03-05 수정일 2012-03-05 발행일 1996-03-31 제 199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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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수난 성지주일 (마태26, 14~27, 66)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맺힌 절규는 고통에 찌들린 우리 모든 인생들의 외침을 대변해 줍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언젠가 우리도 주님과 똑같은 기도를 바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언젠가 우리도 똑같은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쓰라린 외침은 바로 나의 목소리이며 또한 모든 이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백성들은 『호산나!』하면서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열렬하게 환영했으나 하루가 지나자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면서 예수의 처형을 지지했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어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주님을 버렸으나 아버지 하느님만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해도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지상의 현실로는 불행과 비극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말해 신앙안에서의 축복과 은총은 눈물과 슬픔으로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때문이지 결코 하느님이 그를 버리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늙은 아브라함이 나이 백 살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을 때는 그 아들 하나에 아브라함의 미래와 생명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무서운 말씀이 전해졌을 때, 아브라함은 그 두가지를 모두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졌다가는 상인들에게 팔려갔고, 나중엔 이집트인의 종이 되어서는 악의 도전을 수없이 받다가 끝내는 감옥에 들어가서 기약없는 고생을 합니다. 억울한 삶을 외롭게 걸어갑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셉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포기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다 잃었다고 여겼으나 하느님은 더 크게 채워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판단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고난의 그 껍데기만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고난 그 속에 감추어진 축복의 소중한 알맹이를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부귀와 영화만이 축복이요, 은혜로만 생각하고 있으나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의 불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십자가를 내던지고 골고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에 올라서서 그 위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의 인생은 거기서 끝장이 났으며 삶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전도사업은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 밤이 길다고 여기고 있을 때 새벽은 어느덧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은 이처럼 자기를 포기하는 죽음과 고난속에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자 농부들이 땅에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씨앗, 이것은 작년에 죽었던 식물의 열매입니다. 이제 그 씨앗 하나가 땅속에 묻혀 썩게 되면 바로 그 죽은 씨앗에서 새 생명이 터져나옵니다. 이처럼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죽음의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새벽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원리를 실생활에서도 적용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 양보와 희생은 자신을 죽이고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보답이 없다면 인간의 고통과 슬픔의 의미는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파괴 뒤에 새로운 건설이 없다면 자신을 포기한 그 고독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두 형제가 재산 문제로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형이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모든 것을 동생에게 양보하게 됩니다. 그러자 동생도 그 재산을 포기하고 형에게 양보함으로써 동기간의 우의를 되찾았습니다. 그러자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신앙은 주님과의 만남이며 은혜와의 만남입니다. 축복과의 만남이며 진리와 생명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그 어느 것 하나와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그 희생,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로 올라가는 그 고난에서만이 부활의 참된 승리는 주어집니다.

★ 지난 3년동안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 주신 강길웅 신부님의 본란 연재를 끝내며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