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과 기도] 믿음을 키우기 위한 기획 10 신앙의 십자가

정하돈 수녀ㆍ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력일 2012-03-05 수정일 2012-03-05 발행일 1996-03-31 제 199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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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받아들일때 신앙의 고통 극복
매일 죽고 포기하는 삶안에서 생명 체험

그리스도인(Christian)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뒤따르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은 사랑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만이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가 함께 한 어둡고 고통스런 죽음의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고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으며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었다(히브리 9, 15 참조). 하느님은 우리를 거듭 구원의 길로 초대하신다. 그 길은 바로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역시 십자가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죄에 물들어 있는 인간의 자연적 실재를 십자가에 못박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름은 오직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이 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또한 과제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셨다. 또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비 2, 6~11 참조).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새로운 길을 터주셨다』(히브리 10, 20). 예수는 참 인간으로서 광야에서 유혹을 당하셨고 고난을 겪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죄 외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시고(히브리 4, 1)인간적 한계들을 체험하셨다 : 예수의 이러한 인간적인 한계 체험은 우리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예수는 모든 고통과 십자가를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감수하셨다. 예수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하느님께 신뢰하셨으며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께 맡기셨다. 그래서 그분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 앞에서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코 14, 36)하고 기도하셨다.

고통과 십자가의 길은 부활, 즉 승리의 전주곡이며 생명으로 향한 길이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예수는 있을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생명은 죽음안에 감추어 있다. 십자가 죽음안에 생명이 들어있다. 이 생명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전적인 신뢰속에서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 생명과 죽음 사이에 일치가 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사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우정은 사랑의 십자가와 신앙의 십자가를 요구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 사랑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은 인간을 세상 구원의 협조자로서 그리고 고통과 십자가에 동참시키고자 초대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개개인의 능력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는 허락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당신 사랑의 표시로 고통과 십자가를 허락하신다. 바로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그를 정화시켜 당신의 벗이 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진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 얼마나 큰 신비이며 또한 모순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모든 것을 선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 신뢰할 때 십자가는 바로 그분의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는 힘든 시련이나 고통 중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어둠속에 빛을, 부재중에 현존을, 침묵 중에 말씀을, 죽음에서 생명을 찾게 하며 또한 발견하게 한다. 우리는 종종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를 만난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해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캔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구원이다. 십자가는 어둠이요 죽음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이다. 빛과 생명을 가져다 준 십자가는 인간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예수는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하고 순종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의 삶의 중심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제자들의 삶을 「환난」의 삶이라고 했다.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서 자기 이탈을 요구하신다. 인간이 자신을 봉헌, 의탁하는 것은 신앙안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의탁, 신뢰는 자기 이탈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우정안에서 성숙할수록 신앙이 더욱 더 요구된다. 이 신앙은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가 매일의 죽는 삶이며 포기하는 삶안에서만 기대할 수 있고 그 체험이 가능하다. 따라서 죽는 자만이 생명과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십자가는 무겁고 본성상 싫은 것이며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극복하는 방법은 피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하다. 십자가는 인간을 하느님의 벗으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숙시킨다.

정하돈 수녀ㆍ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