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금주의 복음단상] 235 “죽은 자여, 일어나라,,/강길웅 신부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2-03-05 수정일 2012-03-05 발행일 1996-03-24 제 199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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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요한 11, 1~45)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죽은 라자로에게 외치신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무덤속에서 주님의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실 믿고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도 바로 끝 날에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으며 희망이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에 실려 나갈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 앞에 가셔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분에게만 참된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허무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많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 가져보는 공통된 두려움입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문을 통해서 인간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흙으로 가는가, 흙으로 가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인가. 이처럼 인류는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앞에 영원히 혼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걷혀졌습니다. 「죽음」에 외치신 예수님의 목소리 앞에 허무는 사라졌으며 죽음 그 자체도 세력을 잃었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삶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죽어서도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심은, 당신이 장차 보여주실 그 엄청난 사건의 부활을 암시해 줍니다. 썩어서 냄새가 났던 라자로가 다시 살아났듯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죽었다가 그처럼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인류를 죽음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뜻깊게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얼마나 감격스런 외침입니까. 살아 생전의 모든 감격적인 사건을 모두 합쳐봐도 부활의 감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에서의 부활은 전 생애를 보상해주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구약의 경우에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게 되리라는 믿음은 크게 발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실만이 중요했으며,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이나 시련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고통은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를 일시에 전도시키셨습니다.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직접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잘 사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럼 누가 과연 잘 사는 것이냐. 부활의 새벽을 차지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우리는 그래서 살아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영광을 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보았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죽은 오빠가 살아나는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뭘 믿느냐.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믿으면서도 술에 묶여진 사람이 있고 화투에 갇힌 사람이 있으며 춤바람에 탈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탐욕과 쾌락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사치나 허영, 오만함과 불친절이라는 흙속에 묻힌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육신의 두 눈은 멀쩡하게 떠 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죄중에 빠진 우리 자신이 무덤 밖으로 뛰어나와야 합니다. 얽어매고 있는 끈을 용기있게 풀고 나와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금년 사순절에 어떤 자매가 저를 찾아와서는 『뭘 주저하고 있느냐, 빨리 나오거라』하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이 자매는 몇 달 동안 주일미사에도 나오지 않고 신앙을 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고해성사를 보고 나더니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앙이 죽은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부활을 준비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백번 부활하신다 해도 우리 자신이 부활의 새벽을 승리로 맞이하지 못한다면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잘 살았다는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사순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