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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수원교구 하우현본당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2012-03-04 제 278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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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촌에서 공소·본당으로유구하게 이어진 신앙 명맥 
역사·전통 살아있는 곳
볼리외 신부 생활하던
성인 동굴도 볼 수 있어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등산복 차림의 신자들이 삼삼오오 성당으로 모여든다. 사순시기 동안 회개와 보속의 의미로 동굴 순례와 미사 봉헌을 자청한 이들이다. 성당을 출발, 험한 등산로를 2시간여 동안 올라가면 성 루도비코 성인 동굴에 다다를 수 있다.

청계산 최고봉인 국사봉에 자리한 이 동굴은 103위 한국성인 중 한 명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Louis Beaulieu, 서몰례)의 순교신심을 엿볼 수 있는 의미깊은 터다.

하우현본당(주임 정광해 신부)은 평소에는 매월 첫 주일 오후 2시 성 루도비코 성인 동굴에서 순례미사를 봉헌하며, 사순절이나 순교성월 등에는 매주 순례와 미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본당은 신자 수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본당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신자들은 한마음으로 일치, 순례 성당과 성지 조성은 물론 ‘성모님의 학교’와 은퇴사제 공동사제관 건립을 위한 기도와 모금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공소와 본당 설립 이전부터 모습을 드러낸, 오랜 교우촌 역사를 품어온 하우현본당의 선교 뿌리 속으로 들어가본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말기, 하우현은 인천 제물포와 이천, 여주 등을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고 역원이 자리 잡은 교통요지였다.

이 일대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과 울창한 산림, 깊은 계곡 등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살 피난처를 제공하기에 안성맞춤인 터라, 꽤 일찌감치 신자들이 모여든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이곳은 교우들이 때때로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어 살았다고 해서 ‘토굴이’라고도 불렸다.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때에는 한덕운, 김준원 등의 순교자를 내기도 했다.

하우현성당 전경. 1900년에 설립,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우현본당은 신자 수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본당 중 하나로 꼽힌다.
뮈텔 주교(당시는 신부)는 1884년 하우현을 방문, 사목 활동을 펼친 기록을 남겼다. 이후 1894년, 당시 공소였던 하우현에는 모본당인 왕림본당 주임 알릭스 신부와 공소 신자들이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초가 목조강당이 지어졌다.

강당이 마련되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은 우리말을 배우거나 휴양을 위해 하우현에 며칠씩 머물곤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다 신자들의 인심도 후해 사제들의 휴양지로 입소문이 난 덕분이었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도 단체로 소풍을 겸해 하우현을 방문하곤 했으며, 6·25 한국전쟁 때에도 성직·수도자와 신자들이 이곳에 숨어 지낼 만큼 유용한 은신처였다.

또한 이곳은 박해시대, 교회 재건에 투신했던 김기호(요한) 회장이 일선 전교 봉사활동을 그만둔 후 내려와 머문 곳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블랑 주교가 사목할 당시 전국 팔도 도회장(현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직분을 맡아 각 지역 회장들의 교육과 피정 지도 등에 힘쓴 인물이다. 또한 김 회장은 전국 곳곳으로 전교여행을 다니며 주교와 많은 사제들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은퇴 후엔 하우현에 머물며 성당 건축과 본당 설립을 적극 후원한 바 있다.

하우현성당 내부.
하우현 본당사에서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다. 볼리외 신부는 당시 한국에서 사목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2명 중 가장 어린 나이로 한국에 들어와, 수많은 사목계획을 뒤로 한 채 9개월 만에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당시 볼리외 신부는 경기도 광주 묘루니 교우집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 동네에 머물면 교우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한 볼리외 신부는 청계산 중턱 툰토리 동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 밤마다 교우들을 찾아가 교리를 가르치곤 했다. 하지만 동네 주민의 밀고로 체포돼 서울 새남터에서 국가 최고형인 군문효수로 치명한다.

이에 따라 본당 신자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깊은 인연을 맺었던 볼리외 신부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지난 1982년 그를 본당 두 번째 주보성인으로 모시기도 했다.

1900년은 본당이 설립된 뜻깊은 해다. 공소시기를 벗어난 본당 신자들은 이 해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석조 사제관 건축에 돌입한다. 이 사제관은 석조틀에 삼각지붕 형태의 팔각지붕을 얹은 보기 드문 형태를 보여,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사제관은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176호로 보호받고 있다.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 성인상(왼쪽)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제관.
아울러 본당은 1914년에는 문맹퇴치를 위해 성신강습소도 개설했으나 운영상 어려움으로 10년을 채 유지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만다. 이후 본당은 폐쇄를 거듭하다 1954년 완전히 폐쇄돼 공소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하우현이 새롭게 본당의 모습을 갖춘 때는 1978년이다. 본당 폐쇄 24년 만에 1978년 파 레이몽 신부(Raymond Spies)가 임명되면서 하우현은 다시 본당으로 부활, 순교정신 고양과 새로운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