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UN제정 빈곤퇴치의 해 기획] 7 빈곤 악순환 해결책 없나? - 빈곤과의 전쟁(상)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1996-02-18 제 199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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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을 위한 싸움, 빈민운동
「도빈위」설치 등 복음적 요청에 응답
「2천년대 복음화」안 마련, 방향 정립
「바오로 계획」수립…「현장 사도직 」양성의 일환
고금을 막론하고 가난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가치를 억누르는 굴레였다. 그 기세와 끈질김은「가난은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라는 자포자기를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와 비례해 그 수렁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적 삶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도 이어져왔다.

이 싸움은 가난한 자 스스로의 자각과 움직임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동참하기를 원한 많은 활동가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정신을「선택」한 이들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빈곤과의 전쟁」(?)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여기에서는 강제된 빈곤과 싸워온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의 과정과 함께 복음적 명령에 대한 빈민사목의 응답, 교회의 사회사목, 그리고 비판의 대상인 정부 사회복지 정책의 허와 실 등을 3회에 걸쳐 살펴보기로 한다.

1988년. 한국은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한국」하면 6ㆍ25를 떠올리는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그 해 열린 서울 올림픽은 놀라움이었다. 잠실벌에 화려하게 펼쳐진 만국기의 행렬이 전 세계에 중계됨으로써 세계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고 친근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깃발의 그늘에서는 쇠망치를 든 건장한 청년들과 희끗희끗한 머리의 할머니, 갓난아이를 들쳐 업은 아낙의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금자리는 힘없이 무너지고 아낙은 빽빽 우는 아이를 안고 망연히 주저앉는다.

70년대에 시작되어 80년대, 특히 86년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이 치러지던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의 광경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했던가를 웅변한다.

연혁

빈민운동의 효시는 1969년 연세대학교 도시문제 연구소의 도시선교위원회로부터 시작된 도시주민선교, 판자촌 등지에서의 주민조직활동을 꼽고 있다.

80년대는 합동 재개발 방식으로 빈민 거주지에 대한 무차별 철거가 이뤄지는 한편 이전 10년간 태동된 빈민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기이다. 빈민들은 삶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폭력을 수반한 폭압적 철거에 대항해 조직적 철거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 노점상들의 생존권 투쟁, 일용직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 건설, 빈민 지역의 아동ㆍ청소년센터 활동 등 다양한 조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빈민운동 주체가 조직화 되는데, 천주교 도시빈민회(85), 기독교 도시빈민 선교협의회(86), 서울시 철거민 협의회(87), 전국노점상 연합회(87), 지역사회 탁아소 연합회 도시빈민위원회(87), 서울지역 공부방 연합회(89),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90) 등 빈민운동 단체가 결성됐고, 도시빈민연구소(현재 도시연구소, 85),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빈민사목위원회(87)가 설치됐다.

빈민운동의 외형적 확산과 함께 다양화된 영역별 조직화는 90년대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되고, 특히 삶의 단위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빈민지역운동의 이론 정립과 지역활동체 조직을 통해 향후 주민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됐다. 아울러 빈민운동 단체들간의 연대가 활성화됐다.

교회의 관심

전면 철거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던 80년대 중반, 교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적 요청에 대한 조직적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85, 86년 목동, 사당동 철거를 계기로 천주교 도시빈민회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빈민사목위원회가 조직, 설치된 것이다.

목동 철거 현장의 몇몇 신자 활동가로부터 시작된 천도빈은 초창기에는 철거반대 투쟁, 이어 지역 소모임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인 시도를 했고 90년대에는 가난한 이들의 현장에서 함께 하는 삶이라는 장기적 전망을 갖고 있다.

천도빈보다 조금 늦게 서울대교구에 설치된 도시빈민사목위원회는 처음으로 교계 제도안에 빈민사목기구가 설치됐다는 점에서 교회 내에 빈민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빈민사목위원회 역시 초기에는 철거현장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철거의 문제를 여론화시키는 정책 토론회를 현장 체험 등 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94년에는 서울대교구에 사회사목부가 신설되어 빈민사목위원회는 그 산하로 소속되고 활동의 초점이 빈민지역의 소공동체 건설에 맞춰지는 동시에 지역사목체계인 지역복음화 위원회를 서울 4개 지역에 결성했다.

새 응답의 전망

80년대와 90년대 초를 거치면서 빈민과 그들의 지역이 갖는 특성 자체가 물리적, 사회 문화적으로 변화를 겪는다.

철거 등의 사안을 통한 대중적 지역운동의 현장이었던 빈민지역은 철거, 개발로 해체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섬으로써 운동의 동력인 공동체성이 파괴됐다. 또 빈민들은 과거의 물질적 절대 부족으로 겪던 빈곤과는 달리「신빈곤」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빈곤 형태, 즉「적당한 삶의 질」의 결핍을 경험한다. 이런 변화에 직면해 빈민운동 진영은 새로운 운동방향을 모색해야 했고 지역 중심의「지역주민운동」을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설정한 듯하다.

지금까지의 빈민운동은 철거반대, 노점단속 반대투쟁 등 생존권 중심의 사안 운동과 마을 형성, 협동조합 조직 등 주민 중심 지역운동으로 대변된다. 하지만 향후는 빈민지역 해체에 이어 이루어진 지역 재편에 따라 지역운동력의 계승, 발전과 철거반대 투쟁으로 얻은 임시 거주시설, 그리고 공공 임대아파트에서의 생활로 이어지는 주민 운동력을 지역주민운동으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의 과제를 갖는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수립한「빈민사목 2000년 복음화 계획」은「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교회의 공동체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구체적 표현으로서「기초 공동체운동」을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빈민사목위원회는 92년부터 2천년까지를 3단계로 나눈 중장기 계획을 수립,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현장 사도직의 양성을 위한 바오로 계획을 세워 현장에 투신하는 활동가를 양성, 파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 정립과 실험을 통해 빈민운동, 빈민사목의 장기적 전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