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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제정 빈곤퇴치의 해 기획] 6 빈곤 악순환 해결책 없나? - 신빈곤(하)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1996-02-11 제 199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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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되는 가정, 가난의 굴레 

「가정회복」…사회가 담당해야 할 몫
청소년 가장 급증… 무책임한 부모 탓
거리마다 부랑자ㆍ집 나온 노인들
여러 유형의 신빈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기록한 2월의 어느날. 어슴프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종로거리에서 박은O씨는 건물벽에 바짝 붙어 하루의 나머지 햇살을 쬐고 섰다.

때가 덕지덕지 앉은 목덜미 때문인지 높다란 빌딩 안으로는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추운 날씨만 원망한다.

묻는 말에 별로 대꾸도 없지만 한마디씩 웅얼거리는 소리로 그의 전력을 미루어본다. 40대가 채 안되어 보이는 그가 거리생활을 하기 시작한 지는 한 달 남짓.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시골에서 올라와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한 그는 얼마 후 공장에 취직했다. 시골에는 노모와 여동생이 남아있어 그는 월급날이면 가끔 고향을 찾기도 했다.

그러다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아내와 결혼하고 딸 하나를 두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하지만 프레스에 오른손이 눌려 공장일을 못하게 되자 그나마 어려웠던 살림은 끼니 걱정까지 하기에 이른다.

좌절한 그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활이 몇 달 계속되자 아내는 편지 한장 써두지 않고 딸까지 데리고 달랑 집을 나갔다. 며칠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던 그는 자포자기 상태로 거리로 나앉았다. 간간이 전화라도 했던 시골집과는 연락이 끊어진 지 이미 1년이 넘었다.

거리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 김주O씨는 이제 겨우 35살이다. 정신질환 증세가 있는지 금방 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말에도 조리가 없다. 하지만 차근차근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는 대물림 된 가난의 희생자이다.

난폭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던 어머니 밑에서 5남매는 거의 지옥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난폭성은 그 윗대로부터 물려 받은 가난의 굴레, 그리고 그 굴레를 벗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책, 거듭되는 좌절 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알콜 중독으로 술만 먹으면 가족들을 때리던 아버지의 학대 끝에 맏딸은 중학교 3학년때 가출을 해버렸고 셋째였던 그 역시 17살 때 가출, 서울로 올라왔다.

식당 종업원, 중국집 배달원,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제대로 학교교육도 받지 못했고 히스테리까지 갖고 있던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결혼이란 꿈도 꾸지 못했고 그나마 가족들과도 가출 이후 전혀 연락이 안되고 있다.

「보호장치」는 어디에

어디에서고 적응을 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거리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족 조차도 그를 도와 줄 수가 없었다. 이들의 생명과 삶을 돌봐줄 수 있는 보호장치는 이 사회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종로3가 탑골공원, 혹은 파고다로 불리는 공원에는 또 다른 형태의 「거리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기미년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바로 그자리에 모여 있는 꾸부정한 백발의 인파가 바로 그들이다.

멀리 인천에서 왔다는 김OO 할아버지(71)는 『자식들이 있긴 하지만 제 자식 먹이기도 힘든데 늙은 것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집을 나왔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할머니와 사별한지 7년이 됐다는 할아버지의 세 남매 중 맏이는 중학교를 나와 공장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아파트 경비원인데 둘째가 다리가 불편해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서울역 같은데서 자거난 일세집, 복지시설 같은데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간다는 할아버지는 이제 추운데서 떠느니 차라리 빨리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단다. 자식들이 찾아 다니지 않는냐고 묻자 『찾을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안 찾는 저희 마음은 오죽하겠느냐』고 말꼬리를 흐린다.

가난의 마수는 어린 아이들에게 더욱 혹독하다. 돈을 벌어오고 아이들을 먹여살리던 어른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정을 떠나면 남아있는 아이들은 소위 「소년소녀 가장」으로 험난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소년소녀 가장의 세대 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소년소녀 가장 세대는 93년 말 현재 정부의 집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7천3백여 세대, 1만5천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89년 6천5백, 91년 6천9백, 92년 7천89세대에 이어 점점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발생 원인을 보면 과거에는 부모의 사망이 대부분의 이유였으나 부모의 가출이나 이혼 및 재혼 등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결손 가정의 이면에는 거의 대부분 빈곤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져 있고, 그 굴레는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와서는 더 굵고 완고한 것으로 악화된다.

대물림 된 가난, 헤어날 수 없었던 그 가난의 수렁 속에서 유일한 보금자리였던 가정까지도 이제 조각조각 깨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 가난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고 해체된 가족 구성원들은 더 깊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빈곤, 「신빈곤」의 한 가지 형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역사 안에서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귀중한 가치를 지닌 「가족 관계」를 위협한다는 면에서 물질적 빈곤 그 이상의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적 모순 극복해야

가족 관계의 해체는 물론 물질적 가난에서만 그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사회 및 그 구성원 전반에 걸쳐 가치관이 변화하고 세태가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소년소녀 가장이 급증하는 이유는 먹고 살 것이 없어 생기는 결손에서도 기인하지만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 무책임한 부모의 탓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부모의 이혼이나 가출에 의한 소년소녀 가장 발생률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가난으로 인한 「가정의 해체」라는 문제를 이전의 가족 관계를 회복한다거나 가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식으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체되는 가정의 밑바닥에는 거의 반드시 가난과 빈곤이라는 사회적 구조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해결은 넓은 의미에서 커다란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 사회 전체에게 맡겨진 회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