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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제정 빈곤퇴치의 해 기획] 5 빈곤 악순환 해결책 없나? - 신빈곤(상)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1996-02-04 제 198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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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새로운 형태의 빈곤
풍요속 「보편적 삶」마저 상실
“나는 왜 이것밖에…” 상대적 빈곤감 증가
노동 불안ㆍ공동체 해체 등 불러 
불균등한 분배구조가 주원인
1996년,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온갖 화려한 치장으로 진열대를 메우고 있는 백화점들. 일년내내 인파로 북적이는 이 거대한 상점들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를 상징한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서면 술에 취하거나 넋이 나간듯 망연하게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소위 부랑자들을 볼 수 있다. 삶에 대한 어떤 희망적 전망도 갖고 있지 못한 듯 일어서기조차 힘겨워하는 모습은 그 옆을 스쳐가는 세련된 옷차림의 쇼핑 인파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대적 박탈감 증가

전쟁의 폐허 위에서 먹을 것이 없어 보릿고개를 힘겨워하던 6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한 70년대, 그리고 먹고 살만해진 80년대를 거쳐오면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국민소득의 증가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 숫자를 줄이는데 별반 보탬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물리적 생존조차 위협받는 절대 빈곤층이 엄연히 사회의 일부 계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에 싸여있는 상대적 빈곤층은 오히려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들어 소위 「신빈곤」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학문적 관심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고 있다. 물질적 재화의 절대적인 궁핍과는 달리 신빈곤은 「풍요 속에서 규정되는 보편적 삶의 방식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아해체적인 삶의 태도」로 이해된다.

과거에는 물질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한 보편적인 현상으로 빈곤이 간주됐다. 그 후 빠른 경제성장으로 얻은 물질적 풍요가 제대로 분배되지 못한 상태에서 소외된 인구 집단이 발생하고 이들은 과거와 같은 절대빈곤은 아닐지라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결핍되고 박탈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신빈곤 현상의 유형

지난해 한국 도시연구소와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함께 실시한 조사보고서 「한국사회 변화와 빈곤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신빈곤의 유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보고서는 생산과 재생산 부문을 통합적으로 분석해 빈곤계층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유형인 불안정 고용형 빈곤은 생계 유지를 위한 직업 자체가 만성적인 고용 불안정, 저임금, 높은 노동 강도 등을 경험하게 되는 불완전 고용상태에 처함으로써 야기된다. 둘째 노동불능형 빈곤은 노인, 불구, 영세공장 산업재해자 등에 해당되는데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함으로써 발생한다.

셋째 불안정 가정형 빈곤과 네번째 무가정형 빈곤은 기초적 조직 단위인 가정 자체가 심각한 해체를 경험하고 그 결과로써 겪는 빈곤 상황을 지칭한다. 특히 완전히 가정이 해체됨으로써 절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홈리스(homeless), 흔히 부랑자로 불리는 무주거자들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신빈곤 현상의 형성

생산영역에서 노동의 불안정성 증대와 소비영역에서의 상대적 격차 확대, 그리고 가족 및 공동체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신빈곤 현상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을 거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8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통한 물질적 조건의 변화는 60-70년대와는 또 다른 빈곤 형성의 구조를 갖고 있다.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한국의 산업경제구조는 큰 변화를 겪었다. 첨단 산업화로 불리는 산업생산구조의 변화는 무엇보다 노동과정의 고도화(즉 자동화, 합리화, 생산의 외부화, 분절화 등)를 발생시킨다. 여기에 3저로 인한 호황에 이어 급격한 경기하락은 경기변동에 취약한 도시빈곤층의 고용 불안정을 야기한다.

도시빈민의 고용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가운데에서도 근로자의 평균 소득은 상승했다. 하지만 계층간의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소득 증대를 능가해 소비지출이 확대됨으로써 상대적 박탈감의 정도는 더욱 심화됐다.

여기에 주거비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80년대 후반 이후 집 값, 땅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부동산 투기붐이 일었다. 이와 비례해 빈곤층의 주거비는 소득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아졌고 빈곤의 정도는 심화됐다. 더욱이 재개발은 그렇지 않아도 높은 주거비를 폭등시켰고 달동네, 산동네를 쫓겨난 빈곤층은 종국에는 비닐하우스촌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대표적 형태, 주거자

신빈곤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무주거자(homeless)들이다. 무주거자들의 숫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매일 약간의 돈을 내는 일세집, 또는 무주거자들을 위한 시설을 이용하거나 그냥 노숙을 한다.

이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개인적인 불행이나 나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심리적인 변수 못지않게 사회의 경제구조적인 요인이 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빈곤에 대한 보호장치가 없는 사회구조 하에서는 빈곤계층이 무주거자로 전락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일반 빈곤계층과 무주거자들은 가족관계를 살펴볼 때 차별성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무주거자들은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전혀 왕래나 연락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 이들은 원래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했다가 가족의 해체와 함께 무주거자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이 해체된 것은 빈곤으로 인한 것이다.

복지제도가 고도로 발달한 서구사회에서도 역시 노숙자나 허물어져가는 낡은 건물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허다하다는 것은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는 아직 절대빈곤의 문제가 엄연히 상존하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사실 빈곤의 주된 해결 과제이지만 새롭게 나타나는 빈곤 양상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역시 필수적인 과제이다. 서구와 달리 근대와 전근대가 혼재되고, 빈곤의 양상도 60년대와 90년대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한국의 빈곤 문제는 그래서 다각적이고도 정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