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금주의 복음단상] 229 가난, 왜 복인가/강길웅 신부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1996-01-28 제 198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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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마태5.1~12a)
복이란 무엇입니까. 전직 두 대통령의 부정축재와 구속 사건을 보면서 부귀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화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국민 모두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복이라는 것이 세월만 지나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이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는 분명히 악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하느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성서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하늘(마태 6, 19~21 참조)이요, 또한 그리스도 자신(마태 25, 31~46 참조)임을 천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 말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기댈 것이 많고 가진 힘이 커도 붙잡을 것이 많게 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또 많이 배운대로 자기 지혜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있는 자들과 높은 자들, 그리고 지식이 많은 자들은 붙잡고 기댈 수 있는 세속 사정 때문에 하느님이 잘 안보입니다. 잘 안보이니까 매달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붙잡지도 않습니다. 거기서 불행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 가지의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 「가난」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Penes」(페네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노동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극빈자는 아니며 그 날 벌어 그 날 먹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끼니 걱정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Ptochos」(프토코스)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극빈을 말합니다. 사흘에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자들입니다. 거지 라자로(루가 16, 19~31 참조)처럼 누가 돌봐줄 이도 없고 그렇다고 제 손으로 벌어먹지도 못하는 극심한 가난을 말합니다. 이런 가난이 바로 프토코스인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바로 이 프토코스를 말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오랫동안 침략과 억압속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마땅하게 일할 자리도 없었고 또 일을 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진실로 순수하게 찾았습니다.

오늘 1독서(스바 2, 3: 3, 12~13)에서 스바니아는, 하느님은 진정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위로의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맥을 잇는 주체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부귀와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멋지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만 지나면 허무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이 교만하지 않으며 하느님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는 실패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깨닫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과음을 자주 하다가 위장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술 때문에 그 좋은 건강 다 버리고 이제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조금만 지나쳐도 탈이 나고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이 식사 전의 기도를 할 때 보면 그렇게 경건하고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식사인 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있으며 밥풀 하나라도 아주 소중하게 씹어서 삼키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자기 잘못으로 건강을 잃어 불행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건강,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참 행복을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건강하면서도 건강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릴 줄 안다면 그는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가난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난한 마음, 마음을 비우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만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