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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UN이 정한 빈곤퇴치의 해] 4 빈곤 악순환 해결책 없나? - 도시빈민과 도시개발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1996-01-28 제 198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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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없는 재개발… “어디로 갈까요,,
「삶 보다 미관」 우선한 행정 큰 문제
저임금ㆍ열악한 환경ㆍ실업위험 상존
교회, 「도빈위」 창립 등 큰 관심 드러내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교통회관쪽으로 가다 나오는 샛길을 거슬러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왼편으로 회색빛의 커다란 조립식 가건물들이 보인다.

이름하여 「송학마을」. 예전에는 하왕2-1 재개발지구로 불리던 성동구 행당2동 317, 322번지 일대의 세입자들이 영구 임대주택이 지어질 때까지 임시로 거주하는 시설이다.

전주 아래 「봉동」이라는 곳에서 고향을 등지고 올라온 전금자(68세) 할머니도 여기서 살고 있다. 오늘은 인천에 있는 친척집에 들르러 온 언니 전금례(78) 할머니가 와 있다.

5평 방 한 칸에 부엌이자 현관이 붙어있는 비좁은 공간에는 장롱과 TV, 간단한 가재도구 몇 개가 들어서면 그만이다.

『그나마 이 집이라도 들어왔으니까 좋지요. 여기 들어오는 것도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요』

지난 93년 3월15일 하왕2-1 구역 재개발 조합의 설립 및 사업 시행인가로부터 시작된 2년여의 「싸움」은 전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겪은 다른 어떤 풍상보다도 험했다.

『떡대 같은 장정들이 집을 부수겠다고 들이닥칠 땐 정말 겁도 나고 살기 싫었어요. 두들겨 맞고 머리채를 잡혀 휘둘리고… 말도 못했어요』

할머니가 작은 아들은 두고 큰 아들과 딸 하나를 데리고 올라온 것은 수많은 농촌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온 70년대 중반. 남편의 노름빚에 몰려 몇 뙈기 안되는 땅마저 팔아버린 할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등지자 「어찌 살면 밥은 굶을까」하는 마음으로 서울로 가자는 마음을 굳혔다.

당시 돈으로 40만원을 들고 차를 탔지만 시누이에게 10만원 주고 큰 아들 운전면허 딴다고 10만원 주고 남은 돈 20만원 중 15만원으로 한 칸짜리 전세를 얻었다.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양평이나 동두천에 가서 상추를 따와 노점상을 하기를 몇 년. 고생은 됐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좀 나았다. 한 칸 짜리 방은 벽이 허물어져 바람이 들어오고 연탄가스가 새어 가뜩이나 허약한 몸을 축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몸 누일 곳은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미관」을 위해 전면적인 재개발사업이 실행되고 할머니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동네사람들과 팔을 걷고 나섰다.

『날더러 어딜 가라고. 내가 어딜 갈 수 있겠어요? 돈도 없고 땅도 없는 사람 무작정 쫓아내면 어쩌자는 얘긴지…』

9평짜리 방에 남편과 동생, 아들 형제 등 5명이 사는 최옥숙(38세)씨는 이농 현상의 전형이다. 78년 전라도 보성에서 결혼한 뒤 82년 두 아들을 두고 내외만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남편은 막노동, 부인은 파출부나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왔고 지금도 그 일들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군자동에 방을 얻었지만 곧 더 싼 집을 찾아 부천으로 옮겼다가 다시 왕십리의 산동네로 올라왔다. 방 한 칸 삯월세를 못 벗어난 채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던 이들은 89년에서야 겨우 전세를 얻고 그 후 2년 뒤에는 가까스로 방 두 칸을 얻었다. 그런데 재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조합 측은 사탕발림으로 남편 전병찬(48세)을 꼬드겼고 내외는 이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달콤한 약속은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자 분에 받친 남편은 가장 열렬한 투사(?)가 됐다.

그 후 2년,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재개발아파트 중 약 1천세대 정도를 영구 임대주택으로 지을 것을 어느 정도 약속받았고 99년경 완공때까지 거주할 임시 주거시설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남아있는 사람은 현재 겨우 1백2세대 3백78명뿐이다. 애당초 2천5백여 세대가 거주하던 이 지역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도시의 더 외진 변두리로 쫓겨나간 것이다. 이렇게 쫓겨간 사람들은 서초동, 양재동의 비닐하우스촌 등 또 다른 빈민지역을 형성하고 생존을 위한 끝없어 보이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도시빈민의 형성 원인과 역사적 과정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어느 정도 끝나 있다. 한일합방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제 강점기에 그 기원을 갖는 빈민의 형성은 독재정치 지형의 형성과정과 경제성장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심화, 고착됐다. 그리고 이제는 획기적인 국가정책의 개선이 전제되지 않는 한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이는 아주 고질적인 국가, 사회문제가 되어버렸다.

도시빈민의 열악한 삶의 환경은 열악한 주거형태로 상징된다. 하지만 가난, 빈곤은 단지 주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거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곧 이들의 소득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을 갖고 있다. 곧 소위 「노가다」로 불리는 막노동을 비롯해 파출부, 영세 하청공장 노동자, 노점상 등이다. 이런 직업은 모두 저임금에 강도높은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실업의 위험에 항시 노출돼있다. 소득이 낮기 때문에 교육을 받기도 어렵고 문화적으로도 낙후돼 있다. 그런 속에서 당연히 저소득, 열악한 문화, 저교육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들은 자기 형편에 맞는 서민용 주거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재개발지역에 세워지는 집들은 실제로 이들이 들어가 살 수 있기보다는 외지의 돈 많은 이들의 기호에 맞게 지어짐으로써 빈민들은 결국 더욱 외진 변두리로 쫓겨가거나 아예 살 곳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도시빈민에 대한 응답은 빈민사목으로 나타났다. 천주교 도시빈민위원회는 지금부터 10년 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복음적 요청에 따라 창립됐다. 지금까지의 활동이 어떻게 평가되든 천도빈은 교회의 사회사목단체로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교회와 사회에 촉구하고 복음의 자발적 가난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는 더 어려운 상황으로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 많은 활동가, 전문가들의 어두운 전망이다. 그나마 방값이 싼 산동네는 이제 대부분 해체됐고 그 자리에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달동네」의 가장 인간적인 특성인 공동체성 역시 퇴색하고 있으며 가정이 파괴됨으로써 양산되는 부랑자 문제도 새로운 빈곤 형태로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빈곤의 악순환, 부익부빈익빈의 비인간적인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돼야 하는 과제이다. 그것은 특히 이웃 사랑의 명제를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너희중에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설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응답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사명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