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금주의 복음단상] 227 어린양이 되자/강길웅 신부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
입력일 2012-02-27 수정일 2012-02-27 발행일 1996-01-14 제 198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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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요한1,29~34)
세상이 그렇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는 사람은 또 여러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실제로 부정과 부패가 만연된 세상이 용서받고 있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 때문이며, 역사가 발전하며 전진할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1독서(이사 49, 3ㆍ5~6)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 보면 야훼의 종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훼의 종은 정말 힘들여 고생했지만 그저 모든 일이 다 실패하였고 결국 헛수고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그 실패한 그자를 만국의 빛으로 세우시며 그가 땅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야훼의 종이 누구냐.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대단히 무능한 자였고 인간의 지혜로 봤을 때는 완전히 실패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가져오는 빛이 됩니다. 그러면 이처럼 백성에게 빛과 희망과 구원을 줄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이 수백년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 대뜸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린양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 양의 의미가 뭐냐.

첫째는 빠스카 양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에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어린 양은 사실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 없는 양이 죽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구원받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그 속죄 양이 되는 어린 양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사야서(53, 7)에 나오는 어린 양입니다. 그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인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고 했으며 결국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위해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오래 전에 노래했던 그 억울하지만 당당하고, 그리고 만방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야훼의 종은 바로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예수님 오시기 이미 수백년 전에 예언되어졌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서 속에 깊이 감춰진 보물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실제로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고 진정으로 기쁜 소식을 소리 높이 들려 주셨지만 결국 백성은『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아우성을 칠 뿐이었습니다. 제자들마저도 그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분은 영락없는 야훼의 종 그분이었습니다. 영락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이처럼 빛나는 이름이었던「야훼의 종」은 고난 받는 종이었으며 요한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어린 양도 역시 희생 제물로서의 처절한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몫이었으며 그리고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삶을 배워야 합니다. 내 이익만 찾고 내 편리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양보하고 희생해서 누군가의 빛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까 어떤 소녀가장이 서울 모 대학 야간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중학교도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보니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바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을 살렸으며 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야간에 들어가 결국은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대신 죽으면 여러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러나 처지야 어떻든 자기만 살려고 하면 그는 또 여러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지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사람이 큰 손해인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새해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 새해를 우리가 복되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야훼의 종이 되고 또 어린 양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 나를 살리는 길이요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심하게는 하느님까지도 살리는(?)은혜로운 길입니다.

강길웅 신부ㆍ광주 지산동본당 주임